풍수이야기(칼럼)

윤동주 생가

풍수명인 2017. 4. 1. 22:15

지난 2월 한국신지식인협회중앙회 일원으로

중국 방문 중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1945)의

생가 마을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간략히 살펴보면, 윤동주는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서 몇 안되는

벼농사를 짓는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932년 그의 가족이 30리 떨어진 용정(龍井)으로

이사할 때까지 윤동주는 만 15년을 명동촌의

생가에서 생활하였습니다. 이 기간 중 1925년

수많은 민족지사를 배출한 북간도 민족교육의

거점이었던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 후 1932년 용정으로 이사하여 은진중학교와

용정의 광명학원(光明學院)를 다녔고,

1938년 연희전문학교 4년을 거쳐 일본 유학길에

오르나, 조국이 해방되기 2년 전 민족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후쿠오카형무소에 투옥되고,

1945년 2월 16일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짧지만

굵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가 일제의 생체실험

대상으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였지만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고뇌하는 심오한 시인이었으니,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습니다.

 

해란강변

 

배산임수(背山臨水)

배산임수란 풍수에서 말하는 입지의 교과서적인

조건을 의미합니다. 즉 뒤로는 산에 등대고 앞에는

물을 둔다는 말이지요.

 

첫째, 남향으로서의 배산은 북서풍을 피하고

일조가 풍부하며, 둘째, 임수는 취수와 빗물 및

생활하수의 배수가 용이하며 농경지의 관개에도

유리합니다. 즉 배산임수 지형은 자연 기후적인

환경과 사회 경제적인 여건을 충족하여 취락

입지로 선호하였습니다.

 

배산임수 원칙은 묘지 선정에서도 적용합니다.

그러나 배산임수에 부합하더라도 산과 물의 규모,

흐름, 거리 등에 조화와 균형을 상실하면 흉한

땅으로 봅니다.

 

즉 <명산론>의 기록에, “물에 비해 산이 지나치게

큰 것을 독양(獨陽), 산에 비해 물이 너무 많은

것을 독음(獨陰), 기복이 없는 산을 고음(孤陰),

물 흐름이 고요하지 않은 것을 고양(孤陽)이라

하였으니, 음양이 조화롭게 만나지 않은 것을 나쁜

땅이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전저후고(前低後高)

앞에서 말한 위압적인 ‘북신(北辰)’이 초입에서

마을을 수호하는 지세에 걸맞게, 명동촌은 수많은

민족지사를 배출한 명당 마을입니다.

 

혁명열사기념비

 

그러나 이곳 계곡 전체가 북쪽이 낮고 남쪽이 높은

북향 대지로, 개천이 흘러나가는 낮은 곳을 등지며

북쪽 살풍을 피하였지만, 앞이 높은 역경사를 보며

양지 바른 남향집을 고집하였습니다.

따라서 왼쪽의 도로를 낀 든든한 청룡은 남자들의

드센 기질을 나타내고 있으나, 오른쪽의 백호는

개천을 끼고 있어 기운이 끊기는 모습입니다.

 

남향을 고수한 결과로, 풍수의 기본인 배산임수의

원칙에는 정면으로 반하는 좌향으로 나타납니다.

마치 사람이 등받이 없는 의자에 불안하게 앉아

있듯이, 뒷 배경이 없이 세상을 불안하게 저자세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명동촌 일대 계곡의 대부분 집들이 남향을

선호하여 전고후저(前高後低) 형태입니다.

 

윤동주 생가

 

또한, 윤동주의 생가 중 맨 왼쪽 방(사진 참고)이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지맥이 그곳에서 크게 맴도는 혈처(穴處)입니다.

그 혈 기운으로 윤동주는 짧은 생애 내내 감수성

예민한 ‘문학적 소질’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풍수 기본에 맞게 집의 좌향을 맞추었다면

비록 북향집이지만, 문무를 겸비한 굳건한 영웅의

출현을 보았을 것입니다.

즉 배산임수의 원칙에 맞으며 앞이 낮고 뒤가 높은

전저후고(前低後高)의 지세로 인작(人作)을 하였더라면,

이곳 출신 윤동주나 민족지사들에게 안정되고 든든한

기운을 전달하여 그들의 생애에도 긍정적인 개운(改運)

효과가 있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인촌 김성수 생가와 맹사성 생가 등 북향집 사례가

꽤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자연을 거스르는 모든

인위적인 행위는 자연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당연한

규칙입니다. 그래서 남향보다는 뒤가 든든한

‘배산임수’와 ‘전저후고’가 우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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