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이야기(칼럼)

용호배아(龍虎排衙)

풍수명인 2017. 7. 29. 16:18

지난 4월 KBS 생활풍수 수강자들과 함께 의암호 건너편 방동리의 장절공 묘 일대를 간산하기에 앞서 한백록 장군 묘역을 살피기로 하였다. 한장군의 묘는 장절공묘의 수구를 잘 관쇄한 외청룡자락이 다시 용호로 분지한 곳에 조성하였다.

 

충장공 한백록(韓百祿, 1555년~1592년)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수지(綬之)이며

출생지는 춘천이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진잠현감, 지세포만호, 부산진첨사를 역임한 후,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경상 우수사 원균 및 전라 좌수사 이순신 휘하에서 옥포 해전과 합포 해전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우던 중, 1592년 7월 미조항 전투에서 전사하였는데 노비

득충(得忠)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안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입수(入首)

혈을 만들기 위해 혈 뒤 2~3절의 입수가 잔잔하게 기복지현(起伏之玄)하는 생동감 있는

모습이다. 미루어보아 좋은 자리를 만들기 위한 전조이다. 이처럼 맥이 퍼지지 않고(束氣)

위아래로 기복하고 좌우로 지현하는 입수가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다. 바꾸어 말하면, 변화 없이 입수하는 맥은 자리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입수

 

혈의 형태

묘는 혈의 형태인 와(窩), 겸(鉗), 유(乳), 돌(突) 중 겸혈을 겸한 돌혈에 해당하였다. 보통의

돌혈은 주위보다 높고 용호가 뚜렷하지 않으나, 이곳은 겸형의 용호가 돌형의 혈처를 감싼

형태이다.

 

돌혈은 높이 솟은 중앙에서 약간 아래에 치우쳐 혈을 맺는데, 높이 있으니 안정감을

중요시한다.

또한, 이곳은 돌형 중 정격으로서의 소돌(小突)에 해당하여 마치 화분을 엎어 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곳 혈의 범위는 지름이 10여 미터에 달하는 광혈이다.

 

용호는 정격(正格)으로서 장겸격(長鉗格)인데, 장겸격의 결함이 되기 쉬운 원진수(元辰水)의

직수(直水)함을 피하여 굴곡하는 명당수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용호에서 발달한 지각들이 명당수를 굽이굽이 굴곡하게 하였던 흔적이 보인다.

다만, 청룡의 어깨 부분이 절비(切臂)한 곳을 빽빽이 조림하여 비보한 흔적을 볼 수 있으며

전순을 일부 절단하여 무명 묘-아마도 노비 득충의 묘로 추정-를 조성하였음으로 보아 한 장군의

후손 중 장손과 말손에 비하여 중손이 묘의 발음을 더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돌형

 

용호배아(龍虎排衙)

이곳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풍수적인 백미(白眉)는 우백호의 ‘용호배아’이다.

용호배아라 함은 청룡이나 백호에 여러 지각이 있는 경우이다. 이 모습이 마치 관아의 좌우에 병졸들이 도열한 모습과 같은데, 일명 집장배아 (執杖排衙)라고도 한다. 해당 자손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재물과 출세를 향유하는 명당인데, 단, 원진수(元辰水)가 묘 앞을 곧게 흘러가지

않아야 한다.

 

묘역을 관리하면서 가장 지켜야 할 금기 사항이 주변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명당에 뻗어있던 용호배아의 지각 끝을 자르고 평탄하게 하여 밭을 일구고

있었으니 심히 애석한 일이다.

밭을 갈아 얻는 소득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귀손의 발복을 걷어찬 결과이다.

처음의 지형은 청룡과 백호가 겹겹이 감싸 안은 용호교회격(龍虎交會格) -재물에 이로우며 속히

발복하고 오래간다-이었을 것이나 지각을 절단한 결과로 명당수가 권렴수(捲薕水)로 곧게 흘러나가 특히 재물에 불리한 지형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용호배아격에서 가장 경계하여야 할 직수를 인작으로 만든 결과가 되었다.

 

용호배아

 

용호환포(龍虎環抱)

비록 잘린 자락이지만 용호가 모두 다 혈을 향하여 유순하게 감싸는 모양이다. 그중 하나라도 환포하지 않은 자락이 없으니 가솔들의 순종하고 효도하는 기질을 엿볼 수 있다.

 

문필봉

 

조안사(朝案砂)

조안에서 가장 중시하는 점은 혈에서 너무 멀지 않게 적당히 가까워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가까우면 혈을 핍박한다 하여 꺼린다.

이기론자들은 조안이 어느 방향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를 중시하기도 한다.

혈에서 정면에 있는 단정한 문필봉이 후손의 학문적 재질을 짐작케 하는 길사이다. 또한, 그

뒤로 보이는 조산들과도 균형 있는 모양이다.

 

비석

 

비문(碑文)

어떤 인물의 생시의 공적이나 활동을 살펴 사후에 조정(朝廷)에서 그 관직을 올려주는 것을

추증(追贈)이라 한다. 추증은 원래 추은봉증(追恩封贈)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증되어 받은 관직 이름 앞에는 ‘증(贈)’ 자를 붙여 생전에 실제 관직을 역임한 경우와 구분되게 한다.

따라서 비문의 資憲大夫兵曺判書... 는 한백록 장군 생시의 공적을 기려 그의 사후에 관직을

올려주었음을 나타내는 의미로, 생시의 관직과 구분되게 ‘증(譄)’자를 묘비명이나 실록에 붙이게 된다.

또한, 비문의 ‘行’ 字의 앞에 기록한 벼슬이 본연의 관직이지만, 어떠한 이유로 ‘行’ 字의 뒤에

붙는 관직을 수행하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의금부훈련원사로 임명받았으나 부산진구병마첨절제사의 직무를 수행하였음을 나타낸다.

‘諡’ 字는 忠壯의 시호를 받았음을 기록하였다.

 

진귀한 비단과 같이 천작으로 내린 ‘용호배아’의 가치를 상당 부분 상실한 모습을 보며,

풍수에서는 깎고 덜어냄보다 보태고 쌓는 비보가 훨씬 중요한 인작임을 새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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