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이야기(칼럼)

영릉(寧陵)

풍수명인 2017. 3. 30. 22:20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 산83-1번지에 조선 제17대 왕인 효종과 왕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의 능이 있다. 애초 효종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의 건원릉 서쪽에 있었으나 현종 14년(1674)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이장한 다음 해 인선왕후가 사망하여, 왕릉 앞에 위아래로 나란히 비릉(妃陵)을 조성하여 쌍분을 이루었다. 현실(玄室)은 회격(灰隔)으로 하였으며, 왕릉 뒤에 곡장을 둘렀다. 특이한 점은 왕릉과 비릉의 둘레에 십이방위 문자를 새긴 난간석을 이때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한다.

 

왕릉(위)과 비릉

 

병자호란 후 영릉의 주인인 효종(봉림대군)은 그의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서 청나라에

붙들려가 8년간 고초와 굴욕을 당하였다. 효종은 즉위 후 이 수치를 씻고자 청나라 정벌을

위하여,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군비를 증강하여왔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비운의

왕이다.

 

비릉(妃陵)의 지전류

왕릉에서 맺힌 여기(餘氣)가 상당한 거리에 있는 비릉으로 향하고 있었다. 12지신 석상을 능

둘레에 배치하여 지키게 한 점이 특이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이야 전류에 대한 교육을 교과과정으로 배워서 알지만, 그 옛날 국지사들이

어찌 ‘전류’의 개념을 알아챌 수 있었으랴 곰곰이 생각해본다. 비능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며

흐르는 지전류를 발견하고 그 옛날 그것을 피하여 점혈하기가 불가능했으리라는 추측이다.

혈처를 둘러싼 단단한 지질에는 여러 광물질이 섞여 있으니 주변 흙 속을 흐르는 미세한

전류를 끌어당겨 혈처에서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지전류에 노출이 되면 수맥에 노출된 것

이상으로 해가 후손이나 인연 있는 사람에게 나타난다.

즉, 분명한 혈처이니, 처음에는 발복을 누리다가 세월이 흐를수록 그 폐해가 나타나니 풍수가

미신이니 사술이니 하고 사람들이 외면하는 원인 중의 하나이다.

왕가의 능 중 상당수가 이런 기운이 흐르고 있다. 그래선지 유독 조선 왕실은 흉사, 요절, 병마

등에 시달림이 많았던 것 같다.

 

비릉의 주인인 인선왕후의 후손을 살펴보자.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에 청나라의 볼모로 심양에

머물 때 그의 아들 현종이 태어났는데 조선의 역대 왕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출생한 왕이다.

또한, 현종은 왕비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의 영향 아래에서 단 한 명의 후궁도 두지 않은

왕이다.

차남인 효종은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인조의 뒤를 이어 대신 왕위에 올라 그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는데, 그 약점이 아들인 현종 대에 이르러서도 계속되었다. 따라서 그의

재위 기간(1659~1674)에는 남인과 서인의 치열한 당쟁으로 국력이 쇠퇴하였으며, 기근과

질병으로 어려운 시기가 지속하였다. 또한, 재위 기간이 짧아서인지 현종은 조선의 왕 중

무명에 가까운 왕이다.

현종은 병약하여 학질을 앓았고 결핵으로 투병하는 등 건강이 매우 좋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게다가 부왕인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1673년 딸인 명선공주와 명혜공주를 잃고

상심이 커 심신이 극도로 허약하게 되었는데 이듬해 어머니인 인선왕후마저 사망한다. 이와

같은 비운이 계속됨에 따라 현종은 극도로 쇠약해진 후 34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인선왕후의 손자이며 현종의 아들인 경종 또한 재위 4년(172~1724) 동안 극심한 당쟁으로

정국의 혼란과 살육의 정치를 겪으며, 건강이 더욱 악화하였다. 급기야 병석에 누운 지 며칠

만에 급사하였다.

 

아마도 인선왕후의 능에 흐르는 좋지 않은 기운이 현종과 경종을 단명케 하는 등, 어쩌면

사도세자의 비사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주지 않았나 하는 추론을 해본다.

 

영릉(寧陵)의 청룡과 백호

영릉(寧陵)은 풍수지리적인 면에서 특히 청룡과 백호가 아주 길격이다. 영릉의 백호는 관아의

군사들이 양쪽에 도열해 있는 모양을 연출하는 용호배아 (龍虎排衙)격이고, 청룡의 끝자락에

칼을 쥐고 있는 듯이 권력을 상징하는 용호대아도(龍虎帶牙刀)격이며, 청룡과 백호가 서로

적절한 거리를 두고 양보하는 모습의 용호손양(龍虎遜讓)격이다. 그리고 용호가 고르고

지나치게 어느 한쪽이 강하거나 약하지 않은 용호비화(龍虎比和)격이다.

 

겹청룡 자락

 

용호배아격

청룡과 백호의 여러 지각이 안쪽으로 뻗은 모습이 마치 행사장의 좌우에 의장병들이

나열하여있는 모습이다. 귀와 권세를 상징하는데 후손이 막대한 재물을 모으고 높이 출세하는

길사이다. 그러나 원진수(元辰水)-혈 앞에서 합수한 물이 밖으로 흘러 나아가는 물-가 직수하여서는

아니 된다.

영릉(寧陵)의 청룡과 백호에는 여럿의 배아가 있으며 원진수를 잘 관쇄하고 있으니 이곳이

길지임을 나타낸다.

 

백호배아

 

용호대아도격

‘용호대아도’란 청룡과 백호 끝에 뾰족하고 칼처럼 날카로운 작은 지각이 있는 것을 말한다.

후손 중 장군을 배출한다.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검찰, 경찰, 국세청 등 권력기관의 장을

배출하는 길사이다. 영릉의 청룡 자락 외부에 대아도(帶牙刀) 하였다.

 

청룡대아도

 

용호손양격

청룡과 백호가 서로 앞서는 것을 다투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두어 양보하는 지세이다. 형제간에

우애 있고 화목하며 후손이 재물을 모으고 출세한다. 소위 ‘형님 먼저 아우 먼저’이다.

다만, 유정하게 혈을 감싸며 원진수를 조밀하게 막아 돌리던 청룡 자락이 능의 출입도로를

조성하면서 잘려나가 아쉬움이 앞선다. 공사를 할 때 청룡 자락을 훼손하지 않고 우회하는

도로를 만들었다면 수구를 더욱 조밀하게 관쇄하여 더없이 좋았으리라는 생각이다.

능의 백호는 멀리까지 뻗어 나간 모습인데, 청룡이 혈처 가까이에서 환포하고 있다.

 

가상 청룡자락

 

용호비화격

청룡과 백호의 높낮이나 크기가 적절하고 고른 모양으로, 어느 한쪽이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不强不弱) 형세이다. 부귀하고 편안하게 하며, 후손들은 높은 벼슬을 하는 길격 용호가 영릉을

 감싸고 있다.

 

용호와 조안

 

앞에서 말했듯이, 비릉에 흐르는 지전류는 현종의 요절과 경종의 급사 등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본다. 반대로, 그곳의 청룡과 백호의 길함으로 인하여, 후대인 숙종, 영조, 정조 등 현군들이

출현하였으리라는 생각이다.

자연 속에 담긴 암호(code)를 잘 판독함이 우선이요, 거기에 걸맞은 인작(人作)은 그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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