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천을 보는 시각론

‘산천의 본디’를 보는 시각 (6)

풍수명인 2012. 8. 27. 00:31

다. 생각의 본디(느낌)

 

인내천 - 본디 사람은 하늘에 닿아 있다(人乃天). 그러나 출생 때부터 이어지는 꾸며진 의식, 특히 자기를 비하하여 하늘에 간절히 구하고 속죄하는 의타적인 방식에 길들여진 결과 시간이 지날수록 각자가 가진 의자적(依自的, 의타적의 반대) 의식과 능력을 자신 안에 점점 깊이 가두게 된다.

 

어떤 상황에서 어른은 할 수 없는 관(觀)을 어린아이가 보는 현상이 바로 이 경우를 잘 설명하고 있다. 어른은 타인의 눈치 보기에 급급하여 자신을 보지 못하나, 어린아이는 자신을 고집하지 않는 순수함이 있으며 지식(생각)이 개입하지 않은 ‘마음의 '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풍수인 대부분이 오랜 시간 노력을 하여도 산천 생기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니,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신통력 개발에 매달리기도 한다. 그러나 각고의 노력 끝에도 자립 능력을 개발하지 못하고 타(他)에 의한 초능력을 펼치게 되니 처음에는 영락없는 초능력자로 보이지만, 점차 타의 하수인이나 도구로 전락하고 종내에는 버림받는 운명이 된다.

 

자기 안에서 느낌을 주는 ‘나’와 교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을 휘둘림당하기 때문이다. 가려지거나 모순된 부분을 알 수 있는 도구는 생각 이전의 '느낌'인 것이다. 처음의 느낌은 바로 뒤이은 생각이 떠오르면서부터 사라지고, 나 아닌 ‘남'의 생각(기존 지식, 전통, 습관 등) 속에 잠기게 된다. 그러므로 처음의 ’느낌’은 본디와 통하는 수단이고 뒤의 ‘생각’은 본디를 가리는 장애이다.

 

                     기존의 틀(대문)을 통해 보이각의 한계

 

<괴교혈에 대하여>

 

남의 생각에서 탈출한 후, 막혀 있던 자기 고유의 ‘생각의 본디 찾아 자유로운 상상을 하여야 한다. 한 예로, 대다수 풍수사가 혈을 찾는데 가장 어려워하는 ‘괴교혈’(怪巧穴: 眞龍이 행룡하다가 일반적인 기준에는 맞지 않는 기이하고 교묘한 곳에 맺는 혈)이 있다. 이 혈은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겼다는 천장지비(天藏地祕)의 혈로 초능력을 가진 신안(神眼)이나 각안(覺眼)급 풍수사만이 분별할 수 있다 하여 일반 범안(凡眼)은 감히 논하지 말라는 주장도 있다.

 

좀 튀는 추측으로 보이겠지만, 땅속 생기가 불가시의 영역에서도 귀중한 에너지 자원이라면, 그 기운을 탐내어 중간에서 가로챌 수도 있겠구나!하는 입체적이고 막힘없는 상상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남의 생각이 자기의 생각을 막고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하기 때문에 사고의 본디를 가두게 된다.

 

이렇게 보편타당하다는 지식을 벗어난 ‘전대미문의 발상’을 존중하는 태도도 본디에 이를 수 있는 한 방법이다. 일상을 뒤엎는 획기적인 발견은 전혀 의도한 바 없는 ‘뜻밖에’ 하게 된다. 즉 ‘뜻 = 생각’이므로, 뜻 안에는 타의 생각이 있고 나의 본디는 뜻 밖에 있음을 발견한다.

 

위의 ‘생각의 본디’에 의하면, 바로 괴교혈은 어떤 작용(힘)이 생기의 정상 흐름을 의도적으로 이탈시킨 결과라는 잠정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기존 이론을 벗어나 정론화 내지는 규격화 하지 못하는 ‘어떤 작용(힘)’이란 미지의 영역에도 관심을 둬야 하지 않겠는가?

 

라. 이치의 본디

 

<물형의 호칭에 대하여>

 

우리는 태어난 후 줄곧 이기심으로 꾸며진 언어를 교육받아 익숙해져 있으나 스스로 느끼지 못할 뿐이다. 비봉산, 구룡산, 연화부수형, 제왕봉조형, 청학포란형 등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영달을 위하여 작명한 언어는 본디(자연)의 소리와 교감할 수 없으니, 산천의 언어에 주파수를 맞추는 소통의 이치 따라야 한다.

 

                     지하 광산로

 

<수맥에 대하여>

 

인간 우월사고는 그들이 보지 못하는 영역도 당연히 자신들을 위하여 마련되었다는 지극히 위험하고 아둔한 상상을 하게 하는 원흉이다. ‘이 방은 수맥이 흐르니 수맥차단공사를 하여야 한다.’라는 말은 귀에 익은 말이다.

 

그러나 땅은 그 자리에서 장구한 세월 동안 스스로 기맥을 순환하며 생명 활동을 하여 왔다. 그 자리의 원주자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본질과 본 모습에 더하여지고 왜곡된 자연관은 장차 없어져야 할 이치이다. 또한, 만물은 같은 생명 단위(靈)를 가진 존재이니 있는 그대로의 산천을 자연의 구성원으로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수맥이 원활하게 흐르도록 사람이 가로막지 말아야 한다.’라고 바꾸어 말해야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