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천을 보는 시각론

‘산천의 본디’를 보는 시각 (7)

풍수명인 2012. 9. 20. 10:25

<지전류에 대하여>

 

지금까지는 지하의 생기와 수맥 그리고 지상의 응기를 매개 인자로 한정하고 산과 물을 융합한 결과를 길흉화복의 풍수적인 예측에 활용하였다.

 

1932년 독일의 병리학자였던 Gustav Freiherrvon Poul은 <지전류(부제; 암과 각종 질병의 원인)>란 책을 발간하였다. 구스타프는 25년간의 추적 연구 결과 암 환자의 침대 위치나 장시간 머무는 장소가 거의 예외 없이 강한 지전류에 노출되었음을 확인하여 질병과의 인과관계를 규명하였다.

 

지전류는 수맥보다도 더 강하게 인체의 리듬과 면역체계를 교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전류는 미미하여 최소 수백 미터 떨어진 두 지점의 전위차로 그 세기를 수치화하므로 계측기를 이용한 측정이 쉽지 않다. 한편, 지전류는 지하에서 광맥을 만나면 더욱 강하게 흐르기도 하며, 수맥처럼 계절별 수량에 따라 변하지도 않고, 그 광물질을 제거하기 전까지는 변함없이 흐른다.

 

사람들은 단순히 지전류가 인체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점만 고려하여, 수맥과 마찬가지로 기피대상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생체전류’란 생명체가 만들어내는 생명활동에 필요한 전류이다. 크게는 지구란 생명체를 광범위하게 흐르는 전류가 있고, 또 지구 안의 수많은 생명체 내부를 흐르는 국지 전류도 있다. 그러므로 자연의 처지에서 보면, 지전류는 땅이 생명활동을 하는 데 꼭 필요한 ‘생체전류’이니 기피대상이 아닌 필수요소이다.

 

<음양오행에 대하여>

 

물형론을 제외한 형기론과 이기론은 음양오행의 이치를 골격으로 구성한 부분이 많다. 모든 만물이 생길 때 음양의 이치도 같이 나왔으니, 점(압축)과 폭발, 하늘과 땅, 육지와 바다, 빛과 어둠, 여와 남 그리고 태극이 곧 ‘음과 양’이다. 음과 양의 만물은 서로 생산(출산), 화합, 조화, 보완 그리고 하나로 합하려는 기운을 가지고 있다.

 

반면, 오행이론은 태초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금, 목, 수, 화, 토의 각각의 사물에서 고유의 기운을 발산하게 하였는바, 얼핏 보아 상생하는 기운이 있어 좋아 보일 수 있으나, 결국은 극하는 기운을 만나 서로에게 해를 가하는 대립, 갈등, 전쟁, 파괴를 조장하는 골격가지고 있다. 애초의 창시 의도가 악의적이어서 장차 없어져야 할 체계이니, 단지 과도기적으로 사용해야 할 뿐 이치의 본디는 아니다.

 

 

 

 

<혈에 대하여>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혈처’를 권선징악과 적선의 철학, 즉 선하게 살고 남에게 베푸는 자에게 하늘이 허락한 자리라고 강조한다. 즉 주변의 모든 것은 사람을 위하여 오로지 존재한다는 발상이다. 사람 이외에는 그 어떤 생명체의 소리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철학은 수천 년간 확고한 진리로 치부되고 있다.

 

그러나 시각을 바꾸어 산(생명체)의 처지에서 보아, ‘혈’이란 산천의 생기가 더 이상 원활히 흐르지 못하고 뭉쳐있는 아픈 부위이다. 이곳에 묘를 써서 자손의 부귀영달을 꾀하려는 탐욕스러움에 앞서, 그 아픔을 이해하고 뭉친 기를 풀어주며 치유해주려는 공생정신이 필요한 것이다.

 

-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말이다. -

 

아무 의심 없이

진실이라고 묵인된

일정 수준의 지식에서부터

우리의 배움은 출발한다.

모든 배움이 예외없이

'무'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니

'무'에서부터 가르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치이다.

 

과거에 축적된 기초가

진실이 아니라면,

우리의 배움도

거짓의 기반 위에서 출발한다.

또, 감춰지거나 미처 알아내지 못한

진실도 있을 것이다.

 

오래된 전통이나 지식 자체를

익히고 응용함에만 몰두하지 말고,

그 뒤의 숨겨진 이치와 뜻을

간파해 보려는 노력과 지혜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또한, 말과 글로 표현된 지식은

왜곡되었거나 불완전한 부분이 있으니

그것이 전달하지 못하는 느낌을

알아챌 수만 있다면

족히 도통한 경지이리라.

 

 

 

 

산이 있지만 보지 못하고, 산이 소리치지만 듣지 못하는 현실이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가져라”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허상에 가려진 만물의 ‘본디’를 찾아야 한다.

 

산천의 품속에서 살아가며 풀벌레를 무심히 지나치기도 하는 우리의 일상이지만, 사람들은 작가로서 자연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써내려가는 삶을 살고 있다. 생각의 통로를 허물어 버린 후, 반려 동물을 어루만지고 집안의 화초와 교감하듯이, 자연의 일부인 풀벌레의 눈으로 보고 자연을 통하여 자연과 호흡한다면 비로소 자연의 소리를 풀어내는 작가로서의 탁월한 소질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풍수를 연구하다 보면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불가시 영역의 선봉에 서 있다는 고독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렇게 서 있지 않으면 답을 찾지 못하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다만 자신의 본디가 이치의 본디와 느낌을 바탕으로 산천의 본디와 교감하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 각자의 지척에 있음을 공허(空虛)로운 마음으로 알려 드릴 뿐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는가? 그 세계를 이해하고 학습하는 자가 바로 주인공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