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천을 보는 시각론

‘산천의 본디’를 보는 시각 (5)

풍수명인 2012. 8. 7. 13:09

가. 본디의 시각에서 본 각 이론의 한계

 

본디’라는 말의 뜻을 사전에서는 ‘사물이 전하여 내려온 그 처음, ‘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바뀌기 이전의 단순한 모습’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사물의 본질이나 본바탕’이기도 하다. 그리고 풍수적 관점에서의 ‘원시반본(原始返本)’은 만물이 생겨난 때의 본 모습으로의 회귀이다. 따라서 본디로 돌아가 순수한 눈으로 자연을 보면 가려져 있던 산천이 본디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세 이론 중, <물형론>은 자연의 겉모습만을 파악하는 한계를 가진다. 그것도 머릿속에 각인되거나 이미 명명한 몇 가지 형상의 틀에 산천의 모습을 꿰맞추는 수준이다. 그리고 산천을 우리와 같은 생생한 생명체로 보지 않고, 육안에 비친 형체와 그 속에 담긴 기운만을 추정하려는 태도가 그 맹점이다. 따라서 사람이 본디로 돌아가 자연을 그 모습 그대로의 살아 있는 생명체로 대하려는 태도가 긴요하다. 이 전제를 우선하여야 진정 산천과 교감하는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물형론이 산천의 겉모습만을 해석한다고 하지만, 그 접근 태도를 보면 형기론이나 이기론보다는 훨씬 본디적인 이론이다.

 

<형기론>은 똑같은 모습이 존재하지 않는 산천을 유형별로 정형화하여 판단하려는 무리수를 두었다. 이 또한 산천을 사람과 교감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 속에 내재한 기운을 추측하는 데만 급급하니 생명체의 무한한 다양성을 포괄하지 못한다. 즉 경험과학은 과거의 사실에만 적중하는 이론이다.

 

또한, 산과 나는 서로 정면으로 대하거나 등지고 있을 수 있으며, 옆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산이 포근히 감싸 안은 자리가 혈처라고 한다면 응당 산의 등 쪽이 아닌 정면에서 접근하여야 하지만, <이기론>의 맹점은 산이 등 돌린 곳을 좋은 방위로 판단하기도 한다. 이기론 역시 다양한 생명체의 본디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결과이다. 

 

<-- 주왕산 시루봉(시루보다 사람 얼굴형상에 가깝다.)

 

 

나. 시각의 본디

 

어느 하나 완벽하다 싶은 이론이 없음은 비단 풍수분야뿐만이 아니다. 가장 쉬운 예로 나름 진리의 정점에 도달했다는 각 종교 간 이견도 예외는 아니다. 신앙의 본디를 잃고 꾸며지고 왜곡되어 각자 ‘편이한 생활의 틀’로 자리 잡은 결과이리라 본다. 그러므로 각자가 세상만사의 본디를 볼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방법의 본디’를 알면 그 길이 보이기 시작하리라 본다.

 

                      * 햇빛(=지식, 전통)이 가려진 후 명확히 드러나는 가파도와 마라도

 

‘사막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길을 찾지 말고 방향을 찾아라.’가 정답이다. 즉 뭇사람이 답습한 흔적이라고 반드시 진리는 아니다. 그러하니 그곳에서 지도(=논리)는 무용지물이고 나침반(=본질)이 본디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생각’으로 짜인 논리적이고 객관적이라는 틀이 본디를 가리는 역할을 한다. 덮어쓰고 있는 생각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대중이 옳다고 하는 집단적 편견과 오해로부터 자신을 탈출시킬 필요가 있다. 어떠한 존재가 각자의 눈을 가리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지는 그다음의 문제이다.

 

또한, ‘움직임 없는 사물 -> 비생명체 -> 소통대상이 아님’이라는 잘못된 등식에 대하여 사람들은 별 의심을 품지 않는다. 이 모두가 만물의 본디를 알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사고이다. 산천은 살아 있는 생명체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