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군현 지지 내용에는 춘천을 본관으로 하는 최, 박, 신(辛), 허의 성씨가 있다는 기록이 있으나, 오늘날 춘천 일대에서는 춘천 박씨 이외에는 그 맥을 잇지 못하는 듯하다.
또한, 춘천 지역에 시조묘나 중시조-쇠퇴한 가문을 다시 일으킨 조상-묘를 조성하여 지금까지 유택을 유지하는 성씨는 아마도 서면 방동리의 평산 신씨와 이곳 신북읍 발산리의 춘천 박씨이다. 그 외의 성씨들도 오래전에 시조 선산을 조성하였으리라는 추측이지만, 전래되는 자료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 둘의 차이는 아마도 묘터가 자손을 번성시킬 수 있는 명당이거나, 절손 또는 타향으로 쫓겨나는 비명당이나 흉지 아니겠는가의 여부로 풍수사들은 그 원인을 추론한다. 그만큼 시조묘는 성씨의 흥망을 좌우하는 풍수적인 요인이다.
문의공 묘역(후방 숲 언덕 위에 묘소가 있다.)
문의공 박항(朴恒, 1227~1281)은 문헌상으로 박씨의 시조 박혁거세의 29 세손이라고 전해지며, 신라의 제54대 왕인 경명왕의 일곱 번째 왕자 강남대군의 11 세손이자 춘천 박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에서 태어났으며,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에 등용되었다. 충주목사를 시작으로 공적을 쌓아 정1품직에까지 올랐는데, 공은 매사에 공명정대하며 문장이 뛰어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왕에게 직언을 망설이지 않고 백성에 귀 기울이는 성품이 어진 목민관이었다.
당시 고려에 주둔한 원 나라 병사들의 행패가 심하였음을 고려의 사신으로 원에 간 박항이 원나라 황제에게 상소하여 바로잡기도 하였다.
특히 효성과 관련하여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당시 박항은 개경(개성)에 있다가 부모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 황급히 춘주성으로 돌아온 그는 성 아래 쌓인 시체 더미에서 부모의 시신을 찾아 헤맸다. 시신을 찾을 수가 없자 부모와 비슷한 모습의 시체가 발견되면 모조리 수습하여 매장했는데 그 수가 300여 명에 이르렀다 한다.
박항이 55세의 나이로 별세하자 충렬왕이 그의 치적을 기려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임금의 장인이나 정일품(正一品) 공신에게 주던 작호(爵號). 받는 이의 본관인 지명을 앞에 붙인다-에 봉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춘천에 세거 하면서 박항(朴恒)을 시조로 하고, 춘천(春川)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퇴계 선생의 어머니는 춘천 박씨로, 문의공의 5대 외손 이퇴계가 가끔 외가인 춘천에 머물렀다 한다. 이런 연유로 춘천에 ‘퇴계동’이라는 지명의 어원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7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난 퇴계가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이식, 1463~1502)를 사별하자 어머니인 박씨부인이 32세 때부터 그 많은 자녀들을 키워냈는데, 기록에 의하면 박씨는 퇴계 잉태 시 꿈에 공자가 대문으로 찾아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외양보다 내실을 중시하여 자녀 교육에 매진한 바, 이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처럼 상대적으로 유명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춘천과 관련한 또 다른 어원으로는 ‘공지’라는 물고기를 개천에서 잡아 퇴계선생의 밥상에 자주 올리니 지금의 ‘공지천’ 지명이 유래하였다 한다. ‘공지’라는 고기는 성인이 있는 곳에서만 서식하나 지금은 멸종되었다는 기록이다.
문의공묘 전경
문의공묘는 금강산을 태조(太祖)로 하여 여러 중조(中祖)를 거쳐 오봉산을 소조(少祖)로 하며, 좌청룡의 마적산과 우백호인 수리봉이 전호(纏護)한다. 좌측 계곡의 개천은 우두벌로 흘러들어 가는데, 마적산 끝자락이 안(案)을 이루고 주맥으로부터 나온 득(得)의 끝이 뭉툭 솟아 힘 있는 형국으로 파구(破口)를 관쇄(關鎖)하고 있다. 멀리 봉의산과 삼악산을 포함한 여러 산들이 명당을 환포하고 있으니 명당으로서의 조건은 다 갖추었다.
특히 일품인 것은 뒤의 혈성산이 중중한 모습으로 병풍을 두른 듯, 거대한 조류가 날개를 활짝 펴 묘역을 한치의 소홀함이 없이 보호하는 듯하다. 그 부모산에서 낙맥한 맥은 비교적 짧은 거리를 지현(之玄)-기복(起伏) 없이-한 후 유형(乳形) 혈장을 만들었는데 거기에서 다시 잉혈(孕穴)-유혈이 횡룡 입수한 혈 또는 혈판이 한쪽으로 튀어나가 매달린 혈-을 만들었다.
유형 혈장
일부 풍수사들은 문의공 묘 뒤의 혈성산처럼 뚝 떨어지는 지형에서는 무맥지로 혈을 맺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즉 콧잔등처럼 산줄기가 있어야 기가 연결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낙맥(落脈)론은 낙맥하다가 산줄기 또는 봉우리의 접맥이 있으면 큰 자리가 만들어진다는 이론이다. 이 경우 유근석(有根石)이 기맥을 멈추게 하는데 유효하다.
풍수사들이 간과하기 쉬운 지형이 낙맥인데 지맥이 내려온 흔적이 없는 낭떠러지에서는 생기맥이 진행할 수 없다는 선입관으로, 그리고 유형 혈장을 만나면-잉혈을 보지 못하고- 봉긋한 유형 머리 부분에서 혈심을 찾으려 하니 흔히 낭패를 겪는 원인이다.
부모산에서 출발한 맥은 변화가 없이 곧게 진행하면 사맥(死脈)이 되기 쉬운데, 이곳은 좌우로 지현하고 결인속기(結咽束氣)한 후 그 세를 모아 고개를 들어 결혈하였다.
입수(태식잉육)
부모산에서 출맥(낙맥)하여 좁아지는 곳을 태(胎; 조짐, 처음)라고 하는데 생기를 받고는 있으나 외관적으로는 형태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즉 어미의 혈 기운이 모이기는 하나 구체성이나 현실성이 없는 단계이다.
태 다음의 잘록한 곳을 식(息; 생길 식) 또는 속기처(束氣處)라 한다. 식은 새 생명체가 수태되는 것과 같은 단계이다. 잘록한 부분이 잘 보호되고 있는지가 관건이다.
식 이후 혈 뒤에서 다시 기봉한 정상을 잉(孕)이라 한다. 잉은 자궁 속에 있는 생명체가 형체를 갖춘 것에 비유되는 단계이다. 봉분 뒤 봉긋하게 솟은 부분인데 현무정(玄武頂)이라고도 한다.
마지막으로 결혈처(結穴處)인 혈장(穴場)이 육(育)의 단계인데, 어미가 출산하여 자식을 기르는 것에 비유한다.
이와 같이 부모산으로부터의 태-식-잉-육의 단계를 살펴보았는데, 이는 단지 하나의 표준일 뿐 일부 중간 단계 또는 전부가 생략된 경우도 있다. 또한, 엄격히 정형화된 것도 아니다. 문의공묘는 태-식-잉-육의 단계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입수 지점에서 맥이 좌선(左旋)하고 있으니 본손(本孫)의 발복이 빠름을 나타낸다.
문의공묘 근경 <청색부분-혈성(부모)산, 녹색선-봉의산 방향, 황색선-낙맥~입수(태식잉육), 적색선-향>
좌측 전순
우측 전순(장로)
묘의 전순(氈脣)이 특이하다. 좌측이 거의 10여 m 낭떠러지에 가깝지만, 조안(朝案)에 봉의산이 마치 수태한 (봉)황이 해산하기 위해 둥지로 돌아오는 모습으로 만황귀소형(娩凰歸巢形)이다. 즉 자손이 아주 귀하지만 극히 존귀(尊貴)한 자손이 나올 향이다.
조안의 봉의산
반면, 우측 전순도 30~40도의 경사는 있으나 상대적으로 완만하여 손(孫) 발복은 기대할 만한 향이다. 또한, 내청룡보다 내백호가 묘역에서 가까우니 외손의 번성에 좀 더 유리한 형세이다.
문의공 묘를 우측으로 틀어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한 결과 좌측을 실혈(失穴)하였다. 문의공이 평소 귀한 인물이 나기보다는 자손이 번성하기를 희망하자 풍수사가 거기에 적합한 향을 정하였다고 한다. 역시 좌향으로 보면 귀한 인물이 나기는 어렵다는 판단이다. 공의 생시 인품으로 보아 자리는 바르게 찾았으나 개인적인 심혈(尋穴)보다는 가문의 번성을 우선시하였음이 명확해 보인다.
그 후 춘천 박씨는 문의공 이후로 23개 여 파로 나누어질 정도로 자손이 번성하였지만 큰 인물이 출현한 기록은 없다.
2015년도 기준 우리나라 성씨 본관별 인구 자료를 보면, 춘천 박씨는 총 19,389명으로 순위가 264번째인데, 서면 방동리 평산신씨 자손은 총 563,375명으로 14번째 순위이다. 문의공묘에 비하여 장절공묘의 전순은 비교적 완만함을 감안하면 자연은 속임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만약 문의공이 좀 더 많은 자손을 두었더라면 생전의 치적으로 미루어 역사 속에서 더욱더 빛나는 인물로 회자되었을 것이다.
문의공의 자손 번창을 위한 노력과 가문에 대한 배려가 돋보이는 간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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