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이야기(칼럼)

오스트리아의 풍수지리

풍수명인 2018. 9. 30. 14:47

오스트리아 역시 헝가리와 같이 독일,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스위스의 여러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따라서 이 나라도 인근 국가 및 민족들과 연루된 부침(浮沈)의 역사가 많은 나라이다.

 

남서쪽의 알프스 영봉 중 3,797m의 글로스글로크너(Grossglockner) 산이 이 나라 최고봉이다. 보헤미아 산봉우리의 고지대 숲이 북으로 체코 국경까지 뻗어있고, 다뉴브 계곡과 동쪽의 비옥한 저지대는 오스트리아의 대규모 경작 지대이며 이 나라의 수도가 있다. 국토 남부의 카린시아(Carinthia)와 짤즈카머굿은 호수 지대이다.

 

앞서 독일 땅은 평원이 많으며 리기다소나무는 직립(直立)하여 자라므로 그곳 사람들의 잔꾀를 부리지 않는 곧은 인성과 필기구를 연상케 하는 문성(文星)으로 과학자·철학자·문호 등 인재를 길러내는 보고라고 하였다.

이에 비하여 오스트리아 국토의 절반을 차지하는 저지대는 특히 오크(oak)와 밤나무가 빽빽한 숲 지대이다. 오크는 곡선 형태로 자라는 나무로, 목재는 가구 소재로 많이 사용하며 구불구불 물결치듯 수성(水星)을 상징한다. 또한, 오스트리아 산 역시 물결치는 모양의 수형산(水形山)이 주된 형태이고 둥근 금성(金星)과 삼각형의 목성(木星)도 혼합된 모습이다.

 

 오크(©Pixabay)

 

풍수에서 수형산(水形山)은 산 능선의 봉우리들이 물결치듯 구불구불한 모습이다. 중심이 없어 힘이 집중되지 않고 퍼지는 모양이며, 머물지 않고 낮은 곳으로 하강하며 이동하는 성정이다. 따라서 수성체는 문인이나 예술가 또는 선비 등 재주 있는 인물을 배출한다. 따라서 예술인촌을 조성하면 좋다.

 

수형산

 

금형산(金形山)은 대체로 둥근 모양으로 바가지, 가마솥, 철모를 엎어놓은 형태이다. 또 노적가리를 쌓은 듯한 노적봉(露積峰) 혹은 재물을 쌓아둔 모습의 부봉사(富峰砂)라고도 한다. 부자가 많이 배출된다. 금성이 아담하고 작은 규모이면 미인을 배출한다. 금형 건물은 돔형 지붕으로 재운을 부르나, 기본 형태는 원형으로 안정성이 부족하여 지속력이 없어 운기가 오래 유지되지 않는 면도 있다.

금성의 독립된 산 형태는 지평선에서 반쯤 떠오르는 둥근 반원 모습이다. 금성이 수성과 섞여 나타나는 모습은 산 능선부에 여러 금형 봉우리가 파도치며 물이 흐르듯 곡선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형태이다. 각 봉우리가 각이 부드러운 금형으로 금수병체(金水幷體)라고도 한다.

 

금형산

 

목형산(木形山)을 문필봉(文筆峰) 혹은 필암(筆巖)이라 부른다. 삼각형 또는 붓이나 죽순 형상으로 목성(木星)에 해당한다. 붓은 선비의 문방사우로서 학문 또는 벼슬을 상징하며 문필봉이 보이는 곳에서 학자나 선생이 많이 배출된다. 산 정상이 붓끝처럼 뽀족하면 문필봉, 산의 양옆이 살이 붙은 것처럼 둥그스름한 꽃봉오리 모양은 귀인봉이다. 주로 정직성 · 덕성 · 관운 · 귀(貴)를 관장한다. 문장가 · 문관 · 행정가 · 정치가가 난다. 목형 건물은 기운이 상부에 집중되며 단계적으로 운세가 상승한다. 문필봉이 기울어지거나 끝이 갈라지면 화필(畵筆)이라 하여 천한 인물을 배출한다.

 

목형산

 

사람의 출생과 성장 과정에서 보게 되는 주위 산이나 자연의 성상에서 그 기운을 닮아간다는 풍수의 감응론은 오랜동안 확률적으로 유의한 결과를 도출하고 있으며, 이를 근거로 일정한 지역 사람들의 인성을 예단(豫斷)한다. 또한, 조선 후기의 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은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으로 태어난다”라고 하여 땅이 좋아야 훌륭한 인물이 태어난다는 인걸지령론(人傑地靈論)을 그의 저서 택리지(擇里志)에 기록하였다. ‘지령’이란 땅의 영험함을 의미한다.

 

오스트리아 수형산을 주로 한 금형과 목형산의 지령(地靈)의 영험함으로 베토벤, 브람스,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 슈트라우스 등의 거장이 음악적 재능을 키웠고, 현대에는 비엔나 필하모니와 비엔나 소년합창단, 국립오페라단(Staatsoper), Mussikverein, Konzerthaus 등에서 음악적 재능을 가진 이들이 그 뒤를 이어가고 있다. 음악과 더불어 환상적인 건축양식도 오스트리아의 문화유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화가로는 구스타브 클림트, 루벤스 등 수많은 예술분야 인재들이 이 나라의 美를 창조하였다.(2010년 6월 25일 자 “오스트리아의 체(體)와 용(用)”이란 제목으로 필자의 홈페이지에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http://poongsu.tistory.com/entry/스위스와-오스트리아-2?category=336262)

 

알프스의 서북쪽에 있는 스위스의 산형은 삼각형의 뾰쪽뾰쪽한 문필봉이 많은 반면, 오스트리아의 산형과 오크나무 등 식생 그리고 건축물까지 수성(水星)인 곡선(曲線) 형태가 많다. 대체로 구불구불한 곡선은 예술적인 표현, 특히 음악적 선율로 나타난다. 이 나라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모차르트(1756~1791)를 꼽는데, ‘모차르트 혼자서 오스트리아 절반을 먹여 살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따라서 이번 탐방에서는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생가(生家)와 외가(外家)를 풍수 답사하였다.

 

모차르트의 생가와 외가

잘츠부르크(Salzburg)는 독일 국경 지역으로 짤 자크강이 흐르며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로, 오스트리아의 다른 곳과 달리 도시 외곽에 호수들이 산재해있어 땅의 음양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또한, 오스트리아 바로크의 본고장이자 천재적인 작곡가 모차르트의 고향이며 이 도시 중앙의 미라벨 정원은 영화 'The Sound of Music'의 배경이 된 곳이다.

먼저 잘츠부르크 도시 근교를 둘러싼 산들이 수성(水星)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오스트리아 전 국토 중에서도 특히 이곳이 예술의 고장답게 수형산(水形山)이 많은 듯하다.

 

오스트리아의 水形山

 

모차르트 생가는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관리되고 있다. 건물 1층을 쵸코렛 등 식품 매장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출입이 자유로웠다. 매장 입구에서 안쪽으로 수미터 들어간 지점에 풍수적인 혈 기운이 집중되고, 그 범위인 혈권(穴圈)은 반경 30m 정도의 대혈(大穴)을 이루고 있다.

예전에는 모차르트를 출생시키고 키워낸 곳의 1층에서 지금은 식품 매장으로 많은 사람들로 매우 분주한 모습이다. 상가의 흥망성쇠에 대한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생기가 흐르는 상가는 크게 번창하고 사기가 흐르는 상가는 위치나 업종이 좋아도 망하는 사례를 많이 보아왔다. 이곳 점포도 생기가 집중되는 위치로 모차르트의 명성까지 겹쳐 호황을 누리고 있다.

 

모차르트 생가

 

다음 탐방한 곳은 도심을 벗어난 한적한 곳의 모차르트의 외가였다.

모차르트는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5살 연상인 누나 난네를(Nannerl)만 유년기를 넘겼으며 다른 5명은 모두 유아기 때 사망했다. 7남매 중 일찍 사망한 5명과 출생 및 유년기 성장 배경이 동일한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그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이 10명 중 7명 꼴로 높았다는 기록이 있다.

 

걸음마 시절부터 모차르트는 누나 난네를이 아빠에게 음악을 배우는 것을 보고 자랐는데, 음악을 배우는 속도가 너무 빠른 나머지 5살 위 누나의 수준을 어려움 없이 뛰어넘는 남동생에게 뒤처진 누나 난네를이 몹시 낙담했다고 한다.

한편으로 주변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음악능력에 대한 모차르트 아버지의 말을 믿지 못해서 일부러 모차르트의 집에 찾아와서 어린 모차르트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서야 비로소 신뢰하였으며, 어린 시절에 작곡된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모차르트가 즉흥적으로 연주하거나 흥얼거린 것을 부친이 악보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누나인 난네를은 볼프강 호수가 ‘장크트길겐’이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모차르트 외가에 거주하였는데, 앞에 세워진 표지판에는 “모차르트의 누나 난네를은 모차르트의 그늘에 가려졌었지만 재능이 뛰어난 음악가였답니다.”라는 인상적인 내용의 안내판을 세워 두었다.

 

모차르트 외가 안내판

 

모차르트 외가와 고목

 

외가 터에도 혈이 맺혔는데 측정해보니 모차르트 생가의 그것보다 오히려 좀 더 큰 범위이나, 혈 중심이 집 밖으로 2m 정도 벗어나 있었다. 그동안의 예를 보면 혈 중심에서 1m 떨어질 경우 40%, 2m 어긋날 경우 15% 정도(경우에 따라 차이가 있음)로 현저하게 혈 영향이 감소하는 바, 혈 중심을 원하는 위치에 맞추는 것이 대단히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집 밖의 나무 역시 또 다른 상당한 규모의 혈에서 무성한 성장을 하고 있었다.

혈권(穴圈)의 대소와는 별도로 혈 중심에 얼마나 근접하느냐에 따라 그 발현 차이가 상당함을 알 수 있는데, 모차르트와 그의 누나를 비교해보면 각각의 재능과 역량에도 상당한 차이로 영향을 받고 있었다.

 

추측할 수 있는 특이한 점은, 혈 기운을 모든 사람이 받을 수 있게 집 밖에 위치하게 하였으리라는 공생과 배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비록 무언이지만, “우리는 폐쇄적이지 않아요. 드러내지 않고 말없이 모두를 배려하고 있답니다.”라는 느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하다면 이 사람들은 참으로 지혜롭고 관용심 많은 인성의 소유자들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수도 빈(Wien)

빈은 국토의 동쪽 끝 도나우강 상류에 위치한다. 북쪽은 알프스 산맥 끝이 빈 시가지를 알을 품듯 유정하게 감싸며 굽어보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도나우강이 완만한 흐름으로 기나긴 퇴적주(堆積洲)를 만들며 모든 것을 수도 빈에 쌓아놓은 후 흘러가는 지세이다. 완벽한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이루고 있으니 가히 유럽의 배꼽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풍수 대국(大局)이다.

빈을 대표하는 슈테판 대성당(St. Stephen’s Cathedral), 합스부르크가의 주된 거주지였던 호프부르크 궁전(Hofburg Palace), 황가의 직계 가족묘지인 카이저그루프트(.Kapuziner Crypt) 등은 수도 빈의 범위 중에서도 풍수적인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합스부르크가의 주된 거주지 호프부르크궁전(©오스트리아관광청)

 

이 장소는 빈의 중앙부에 해당하는데 흡사 알프스가 왼쪽 날개 끝에 품고 있는 알의 위치에 해당한다(봉황포란형). 달리 말하면, 동쪽으로 길게 뻗은 알프스가 희롱하는 여의주라고 표현하고 싶은 대명당이다.

기원 전후로부터 여러 민족이 이곳에서 기운이 집중되는 ‘여의주’ 지점을 정확히 찾지 못하여 저마다 부침을 겪으며 주인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는 여의주 또는 알에 해당하는 곳을 정확히 찾아 황제의 거처와 황가의 묘지를 조성하였으니, 합스부르크 가문이 13세기부터 600여년간 유럽을 지배할 수 있었던 원천으로 판단한다.

 

더 나아가 합스부르크가의 장례 풍습을 살펴보면, 동부 알프스의 여의주에 해당하는 빈의 카이저그루프트(KapuzinerCrypt)라는 지하 황실 무덤은 과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국의 황제 직계 가족용이다. 그곳에는 12명의 황제, 19명의 여제와 여왕의 체백이 안치되었다.

체백과는 별도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심장은 은제 용기에 담아 아우구스티너 성당에, 내장은 슈테판성당에 각각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체백이 온전히 보관되도록 변하기 쉬운 내장과 중요한 심장을 기운이 집중되는 여러 곳에 따로 안치하여, 발복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전통적인 풍습이었을 것이다.

당시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런 수준의 기감응 방법을 사용하였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어쨌든 가문의 번영에 상당한 효과가 있었으리라 본다.

 

유사한 사례로 우리나라 왕가의 태실과 근대에 김성수 가문의 묘지 조성 가통을 들 수 있다.

옛날 왕실에서는 왕손이 출생하면 신생 왕손의 태를 봉안하고 표석을 세우는 전통이 있는데 이를 ‘태실(胎室)’이라 하였다. 태는 태아에게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며 특히 왕손의 태인 경우에는 국운에 영향을 끼친다 하여 석재로 만든 태실을 따로 조성하고 소중히 관리하였다. 태실은 지기가 뭉친 길지에 봉안하며 그 절차와 예법 또한 매우 엄격하였다. 태실의 주위에는 일체의 벌목·개간·방목·채석 등을 금하는 금표(禁標)를 세우고, 왕은 300보, 대군은 200보, 기타 군과 공주는 100보로 금표 범위를 정하였다. 국왕 태실은 8명의 군사를 배치하여 관리하도록 하였다.

 

한편, 근대 인물로 교육가, 언론인, 기업가인 김성수는 제2대 부통령까지 지낸 인물이다. 보통은 부부가 쌍봉으로 묘를 조성하고 연고지에 선산을 마련하는 풍습이 보편적인데, 이에 반해 그의 가문에서는 전국 각지의 명당에 조상들의 묘를 조성하였다. 즉 부부를 각각 분리하여 거리에 무관하게 따로 벽지나 오지를 가리지 않고 묘를 쓰는 풍습을 고수하였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명당에 하나의 봉분을 조성하여 풍수적인 발복 효과의 극대화를 꾀하였는데, 그의 화려한 행적에 걸맞은 가문의 전통이었다. 그러나 과거 일제강점기의 행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최근에 분류되었다.

 

오스트리아를 떠나며

오스트리아를 떠나면서 두 가지 상념이 떠오른다.

우선은 합스부르크 가의 풍수에 대한 혜안(慧眼)에서 느낀 경이로움이다.

조선시대 지관을 선발하는 시험과목 서적 중 탁옥부(琢玉斧)는 '옥을 다듬는 도끼'라는 뜻인데, ‘옥’은 산천 즉 풍수 대상을 말하고 ‘도끼’는 풍수 책을 말한다. 그 내용 중 “풍수지리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나라를 열고(開國) 도읍지를 정하는 일”이라는 기록이 있다.

합스부르크가 선조들이 정한 ‘빈’이라는 수도의 위치는 진주와 같이 유럽에서 지금도 빛을 발한다. 또한, 그들 가문이 전쟁이 아닌 국가 간 정략결혼을 통해 세를 확장한 지혜로움이 돋보인다. 그야말로 관용과 아름다움, 자기 계발을 추구하는 기질을 지닌 나라이다.

그러나 길지무전미(吉地無全美)이다. 즉 “풍수에서는 흠없이 완전무결하게 좋은 땅은 없다.”라는 뜻이다. 후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근친혼을 고수하여 야기된 유전병으로 나라가 패망에 이르렀다는 주장이 있다. 그 유명한 합스부르크 가의 유전병이란 주걱턱과 불거진 입술 그리고 작은 키와 낮은 지능지수 등을 들 수 있다.

어쨌든 땅은 사람의 길흉화복과 흥망성쇠에 관여한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근친혼을 고집하는 폐쇄적이고 부정적인 사고는 본래 이 나라의 기질이 아니다. 그 옛날 중국의 강희제가 “국운의 흥망성쇠는 풍수보다는 군주의 덕에 달려있다.”라고 말했듯이 초지일관(初志一貫)은 참으로 어려운 모양이다.

또 하나의 상념으로, 보통은 땅 위의 공간에 있는 풍수적인 자료와 사람의 노력 여하에 따라 인걸의 역량 정도가 결정되는데, 특정 장소의 공간 자료(응기, 應氣)와 노력에 더하여 풍수적으로 정확한 위치(지기, 地氣) 선정이 결합되면 많은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덧붙여 모차르트의 생가와 외가 터의 사례로 보아 혈 중심 지점의 정확한 선정 여부에 따라 그 발현이 현저하게 갈린다는 풍수적 결과론을 ‘인걸선택지령론(人傑選擇地靈論)’이라 하고 싶다.

 

맹자는 “천시(天時)가 지리(地利)만 같지 못하고, 지리가 인화(人和)만 같지 못하다”라고 했다. 공간적인 풍수가 중요하지만 사람의 운명처럼 정해진 ‘시기’를 잘 파악하는 지혜도 중요하다. 세상도 변한다.

풍수에 해박한 오스트리아인들이 인화하며 때를 기다려 재차 부흥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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