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작(天作)인 땅을 비롯한 자연과 함께 건물, 토목, 위치 선정 등 인작(人作)은 사람과 단체 국가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철칙에 예외는 없었다.
유럽을 돌아보며 개탄하는 바는, 그리 넓지 않은 고정된 땅덩어리 안에서 수많은 국가들이 서로 땅따먹기 제로섬 게임에 휘말려왔다는 점이다. 그중 풍수지리 환경이 좋은 나라는 비교적 넓은 국토를 가진 강대국이고 열악한 조건에서 버티는 나라는 과거의 국토를 회복하지 못하고 옛 영화를 회상하며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약소국에 머물러 있으며, 그 기준에 예외가 없었다.
이 나라의 수도 부다페스트의 풍수지리를 관찰하며 내내 떠오르는 상념이다.
헝가리의 자연과 약사(略史)
헝가리는 한반도 면적의 40% 정도이고 주변에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우크라이나 7개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도나우 강은 국토를 양분하며 흐르고 있으며, 육지 내 바다로 불리는 벌러톤 호수가 있다. 국토의 2/3가 온천 개발이 가능한 지역으로, 1000여 개의 온천과 지하에는 2500㎦의 온천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전 국토의 3/4이 낮은 평원 지대이다.
우선, 풍수지리를 판단하기에 앞서 이 나라의 약사를 간추릴 필요가 있다.
헝가리인들은 그들의 선조인 마쟈르족이 9세기 말 러시아로부터 이주하여, 1001년 처음 독립왕국을 창건하였다고 믿고 있지만, 정확히는 어디에서 그들 조상이 왔는지 모르는 상태이다. 헝가리의 국명도 '훈'에서 유래를 했다는 설이 있고, 98.5%인 마자르족’이 아시아계의 ‘말갈족’ 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주장도 있다.
4세기 중반 '훈'이라는 이름하에 유럽이 공포에 휩싸인 후, 이어서 몽골의 침략이 있었다. 그들의 말발굽을 가까스로 벗어났으나 16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하였고, 오스만을 물리친 오스트리아가 또다시 수탈과 억압을 자행한다.
오랜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독립투쟁 결과 1867년 오스트리아와의 화해협정 체결로 헝가리는 내정상 독립하였지만 오스트리아 황제를 헝가리의 왕으로 섬기는 이중군주국(Dual Monarchy)으로 바뀌었으며, 이러한 체제는 1918년 오스트리아 패전으로 인한 함부르크 왕조 해체 시까지 지속되었다.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동맹국으로 어쩔 수 없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나 패전국의 가혹한 책임을 지고 국토의 71%, 인구의 60%를 인접국에 양도하게 되어 유럽의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옛헝가리 영토(www.best-things-in-hungary.com)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49년에는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8월에는 헌법 제정으로 소련의 위성국이 된다. 대규모의 반소 인민봉기가 1956년에 발생하자, 소련군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그 결과 친소 카다르(Kadar, J.)의 새 정부가 들어선다.
새 정부는 1967년 소련과의 우호조약을 강화하는 한편, 낙후된 경제개발에 주력하고 광범위한 자유화 정책과 민생 중시 정책을 시행한다. 현재 유럽연합(EU) 회원국으로 주변 국가들과 정치·경제·군사적 유대관계를 긴밀히 하고 있다. 또한 각종 경제개혁 및 개방정책을 계속 추진 중이다.
다만 인접한 국가인 루마니아와는 트란실바니아 땅과 그 나라에 거주하는 마쟈르족(200만 명)의 지위 문제를 놓고 갈등 관계에 있다.
이 나라의 역사는 한마디로 ‘안 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속담처럼 불운과 비운의 과거를 가진 나라이다. 자살률이 한국 다음으로 2위이고, 우리보다 훨씬 심한 전쟁과 핍박 트라우마를 지닌 나라이다. 그야말로 이 나라의 역사를 배경한 영화 ‘그루미 선데이(Gloomy Sunday)'처럼 미묘한 허탈감이 있다.
부다페스트 풍수지리
이 나라의 수도를 동서로 가르며 도나우 강이 흐른다. 강 서쪽은 왕궁 등 고적들과 구시가지가 있는 ‘부다’ 지구이고, 동쪽은 상업시설이 많은 ‘페스트’ 지구이다. 페스트가 평탄하고 단조로운 평야에 있는 반면 야노슈 산 구릉의 사면에 세워진 부도는 도나우강 서안에 펼쳐져 있다.
부다성을 중심으로 본 도나우강 물길은 부다 쪽이 반궁수(反弓水)이고, 페스트 쪽은 요대수(腰帶水)이다.
물길이든 도로이든 활 모양의 반대쪽에 위치하는 터를 반궁수(反弓水)라 하며, 물의 공격 사면으로 흐르는 물이 기(氣)와 함께 빠지는 흉지이다. 풍수(風水)에서는 반궁수(反弓水)를 꺼려한다. 반면, 요대수는 그 지역을 마치 활 모양이나 허리띠와 같은 모습으로 감싸고 흐르는 물길이다. 요대수는 기(氣)와 부(富)가 모이는 길격이다.
반궁수인 부다 성과 요대수인 페스트 지구(Google 지도)
요대수를 낀 좋은 지리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17세기까지 페스트 지구는 방치된 상태로 낙후되어 있었다. 그리고 호우기에는 상습 침수지역으로 한낱 나라의 걱정거리임과 동시에 도나우 강의 거대한 수살(水殺)을 피하지 못하는 지역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18세기부터 왕국의 행정 기관 소재지였던 페스트 지구는 18세기와 19세기에 빠른 속도로 성장을 하게 된다. 도시를 성장시키려면 필수적인 도로 정비와 확장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사진에서와 같이 도나우 강변에도 마차와 차량이 통행할 수 있도록 2단계의 도로를 건설하였을 것이다. 지금의 2단계로 만든 강변도로는 강의 거대한 수살과 홍수를 막아주는 유익한 역할을 한다. 풍수는 천작뿐만 아니라 인위적인 비보술(裨補術)을 아주 중요한 분야로 다룬다.
따라서 18세기부터 페스트 지구는 순화(醇化)한 요대수인 도나우 물길에 힘입어 이미 부다 전체 인구보다 많아지고 그 후 급격히 증가한다. 즉 이 도시의 성장은 페스트 지구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옛날의 불모지가 근래에 유용한 땅으로 변한 것을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으로 풍수 이론에 꿰 맞추는게 아닌가?”라고 흔히 묻는 사례가 많다.
헝가리 도나우강변처럼 우리나라 서울 한강변의 과거는 채마밭이나 모래밭으로 쓸모없이 방치된 모습이었으며 상습 수해지역이었다. 그 후 정부 시책으로 사방사업을 하고 둑 모양의 88도로를 건설한 후로 한강변 땅의 팔자가 귀한 몸으로 둔갑을 한다. 그 결과 한강변은 수살(水殺)과 수해(水害)를 피하고, 요대수 지형의 잇점을 만끽하고 있다. 즉 한강변의 많은 지역이 인작인 88도로나 강북도로 덕분에 부와 번영을 누리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변화의 원인으로, 풍수지리는 사람이나 정책입안자의 ‘생각’에 영향을 미쳐 풍수적인 행위를 유도하고 그에 따른 길흉화복이 도출된다는 형이상학적인 작용이다.
도나우 강변도로- 아래 단은 차량, 윗 단은 전철이 다닌다.
13세기 후반 축조된 부다 성은 헝가리 국왕들이 살았던 역사적인 성채이며, 현재 일부를 대통령궁으로 사용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왕성(王城) 바로 아래 도나우강의 반궁수 흐름으로 끊임없이 땅의 기운을 빼앗기고 오랜 세월 나라의 불운을 겪으며 용케도 버티고 있는 이 나라가 경이로울 뿐이다.
또 하나 가장 기본인 풍수 원칙이 있다. 풍수 문외한도 알수 있는 상식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이다. 즉 뒤로 산을 의지하고 앞에 물을 면하고 있는 땅의 형세를 말함인데, 부다 성의 입지가 ‘임수’는 충족하였으나, ‘배산’을 하지 않으니 항상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은 듯 뒤가 허전하고 불안정한 형세이다.
10세기에 마자르족이 처음 수도로 정한 에스테르곰 지역의 왕궁도 ‘반궁수’이고 ‘배산’ 즉 등받이가 없는 지세로 부다성과 유사하다. 미루어보아, 땅을 정함에 있어 풍수 이외의 다른 철학이나 원칙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부다 지구의 서북방에는 반달 모습의 금성체(金星體)인 해발 526m 야노슈 산이 부(富)함과 귀(貴)함의 아름다운 자태로 부다 지구를 다정하게 품에 안고 있다. 이 나라의 수도에서 가장 풍수적인 명당터(대혈처)가 야노슈 산기슭 한 지점에서 기를 발산하고 있으나, 지금 그 자리는 애석하게도 무심해 보이는 주택들이 들어서있을 뿐이다.
뒷쪽이 야노슈 산이고 중앙은 부다성이다
야노슈 산은 흡사 개성 송악산 기슭에서 442년 동안 고려의 왕성터였던 ‘만월대’를 뒤에서 유정하게 안고 있는 산 모습과 유사한 금성체이다.
과거의 부강을 재현하기 위하여 이 기슭에 현재 헝가리의 최고 요처(要處)가 자리한다면 더없이 좋으리라는 바람이다. 더하여 도나우강과도 상당한 거리를 두게 되니 반궁수의 흉함을 능히 피할 수 있으리라.
서울의 동작동 국립묘지터의 명당인 창빈 안씨 묘가 한강의 반궁수 공격 사면에 있으나 한강과의 거리가 멀어 흉격이 비보된 대명당이 되는 이치와 같다.
위의 몇 가지 풍수적 해석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수도의 위치를 영토 전역을 대상으로 풍수 이론에 따라 정하였다면 이 나라가 역사 속에서 처참한 불운을 겪지 않고 더욱 부강하게 되었으리라는 판단이다. 필자는 도나우강을 좀 더 내려간 하류로 ‘버여(Baja)’와 ‘모하치(Mohács)’ 지역 사이를 수도 이전터로 점지하여 완성한 작품을 지난 2011년 헝가리 정부 측에 전달한 적이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모하치 지역의 도나우강 건너 너른 평원을 수도 이전지로 추천하였다. 이 지역은 도나우강과 다른 물줄기가 합수되는 곳으로 요대수와 배산임수 원칙도 충족하는 기가 충만한 땅이다. 참고로 풍수에서는 물이 흐르지 않지만 기가 흘러오는 길도 물길로 본다.
천문국가도 헝가리 헝가리여! 처음과 같이 일어나라
돌이켜보면, 제1차 대전 후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에게 할애하여 현재 두 나라 국경이 된 도나우강변이 필자에게는 더없이 좋은 수도 이전터로 보인다. 일찍이 그곳에 나라의 중심인 수도가 자리하였더라면 국토와 국민의 3분지 2를 상실하는 비운은 겪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남의 땅이 된 역사를 돌이킬 수는 없지 않겠는가.
세계문화유산인 부다성에는 거대한 독수리(또는 송골매)상인 투룰 동상(Turul statue)이 세워져 있다. 헝가리 민족의 상징인 이 동상의 주인공 투룰은 헝가리 건국의 아버지 아르파드를 낳았다는 전설의 새다. 독수리의 발을 보면 '왕의 칼'을 움켜쥐고 날아가는 형상이다. 전설에 의하면, 칼 끝이 가리키는 방향에 왕궁을 지으라는 신탁이 있었다고도 한다.
이런 이유로 왕궁이 풍수 이론을 무시하고 그 방향대로 자리하였다면 풍수와의 괴리를 항변할 수도 있으리라. 아니면 그 옛날 마쟈르 선조들의 선견지명으로 강변에 왕궁을 지어 훗날 관광대국의 단초를 삼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노슈 산자락의 대혈처가 뇌리에서 아른거리며 지워지지 않는다.
투룰 동상
아무튼 동양적인 풍수 이론과는 전혀 맞지 않는 헝가리를 탐방하며 내내 혼란스러움을 겪었다. 영어권 등에서는 산과 강 등 만물을 남과 여로 성을 부여하여 의인화하고 있으나, 정작 실제에서는 그 생명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확신하는 바는, 땅을 비롯한 모든 자연은 생명체이며 사람들과 다른 생명체의 길흉화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이곳은 내가 등 돌린 곳이니 살면 안 돼, 저곳은 내가 안아주는 땅이니 집을 짓기 좋은 곳이야”라고 자연은 늘 우리에게 말한다. 다만 우리가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듣지 못한다.
헝가리여! 귀를 열어 처음과 같이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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