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이야기(칼럼)

오행(五行)과 건축 2

풍수명인 2010. 3. 20. 00:25

2010년 03월 04일 (목)

옛날부터 우리는 하늘과 땅에 극진히 제사(祭祀)를 올려 드렸던 민족이다. 훗날 우리의 국력이 약해지자 주변국으로부터 하늘에 제사를 올리지 말 것을 강요받고, 천제(天祭)를 중단했던 쓰라린 역사를 안고 현대를 살고 있다.

당시 그들의 강압에 의하여 하늘 제사를 지내 드리지 못했던 절박했던 심정을 망각한 채, 지금은 여건이 가능한데도 천제를 다시 올려 드릴 기미조차 찾아볼 수 없으니 안타까움과 착잡함이 교차한다. 하늘과 땅에 제사를 올리던 현존하는 유적으로는 환구단과 사직단이 대표적이다.

환구단(圜丘壇)
서울 소공동에 있는 조선호텔 자리에 있었던 환구단은 또 달리 ‘원구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형태가 지붕은 원뿔꼴이었으며 3층의 둥근 단(壇)위에 건축하였다. 옛날로부터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은 원의 형태로, 땅에 제사지내는 단은 사각형으로 모난 모양을 하였기 때문이다.

   
▲ 환구단 옛날 모습 ⓒWikipedia 화강암으로 된 3층의 단 위에 삿갓 모양의 금색 원뿔꼴 지붕으로, 경운궁(덕수궁) 맞은편에 있었으며 천자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장소였다. 1912년 일제에 의하여 철거되고 지금은 조선호텔이 들어서 있다.

 이를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는데, 원(圓)은 오행상 ‘금(金)’이고 하늘을 뜻하며 아버지를, 그리고 땅을 상징하는 방형(方形), 즉 사각형은 '토(土)'로서 어머니를 의미하기도 한다. 상생(相生)관계로는 토생금(土生金)이니 땅의 풍요로운 기운과 생기가 위로 올라 하늘을 보완하는 이치이다. 여기에 자식으로서의 인간을 더하면 삼재 사상의 ‘삼재(三才)’인 천(天), 지(地), 인(人)이 되기도 한다.

천제는 삼국 시대에도 거행하였을 것으로 추측하나, 고려사에 따르면 제도화된 천제는 고려 성종 재위(981~997년) 때부터라는 기록이 있다. 우리 민족사에서 역대 제왕들이 제위에 오를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천제를 올리는 것이었다. 그 후 조선 초기에 이르러 ‘천자(天子)가 아닌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옳지 않고, 오로지 천자의 나라인 중국에서만 천제를 지낸다.’라는 중국의 압력과 사대주의자들의 강압에 의해 세조(재위 1455∼1468) 때 천제가 중단되었다.

그로부터 433년이 지난 후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 세우려는 고종이 황제로 즉위함과 동시에 중국의 ‘천자사상’과 일본의 ‘천황제도’에 맞서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천자국임을 선포하게 된다. 이에 따라 환구단에서 그동안 중단되었던 천제를 다시 올리기 시작하였다. 대외적인 나라의 위신과 대내적인 자존을 세우려고 하늘에 기원하는 통한의 제사였을 것이다. “하늘이시여! 우리 대한을 도우소서...”

한일합방으로 조선총독부가 설치되고 그로부터 3년 뒤인 1913년 일본은 환구단을 철거하고 총독부 부속건물인 조선 경성철도호텔을 세워 그 신성을 의도적으로 훼손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더하여, 현재의 조선호텔을 1967년 건립할 때 신주를 모시던 황궁우만 제외하고 모두 철거해 버리는 우를 범하게 되니 환구단은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던 때보다 더한 시련을 겪게 된다.

   
▲ 황궁우(皇穹宇); 환구단의 부속건물로서 화강암 기단 위에 3층의 팔각 건물로 건축하였다. 천지 모든 신령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 석고(石鼓); 고종황제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한 조형물이다. 세 개의 돌 북은 천제 올릴 때 사용하는 악기를 형상화하였다.

이처럼 당시의 주변 강대국인 중국과 일본이 번갈아 가며 눈엣가시처럼 우리의 하늘 제사를 못 올리게 하는 압박을 가하였던 씁쓸한 역사적 잔재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천제를 올리던 곳이 특급 호텔의 정원 일부분으로 전락한 채 고층 빌딩의 그늘에 덮여 사람들의 기억에서 그 존재가 잊혀져 가는 현실이다. 최소한의 유지 관리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음이 역력하다.

사직단(社稷壇)
태조 이성계가 한양 천도 후,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먼저 경복궁과 그 우측에 사직단, 좌측에 종묘(宗廟)를 건립하였다. 이 사직과 종묘를 줄여서 종사(宗社)라 하는데 조선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의전 장소이며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한다. 이에 따라 국가의 중요한 인물을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 부르기도 한다.

   
▲ 사직단(社稷壇); 동쪽에는 사단을 서쪽에는 직단을 배치하였다.

사직단은 방형(사각 형태)으로서 땅을 상징하며 오행으로는 토(土)에 속한다. 한 변이 25척인 두 개의 정사각형 단을 높이 3척으로 조성하였으며 주위에는 두 겹의 담장을 둘렀다. 단 위에는 각 방위에 따라 황색, 청색, 백색, 적색, 흑색 등 다섯 가지 빛깔의 흙을 덮었다. 풍수에서 황색은 중앙, 청색은 동쪽, 백색은 서쪽, 적색은 남쪽 그리고 흑색은 북방위에 각각 해당한다. 또한, 정사각형의 형태는 원형에 가까운 균형미로 기가 뭉치는 형태이기도 하다. 

   
▲ 사직단의 내부 3 도(三道); 중앙이 왕의 통로이며 직선 통로 끝에 제물을 준비하던 곳으로 보임.

  동쪽에 사단(社壇)을 설치하고 토지(국토)의 신을, 그리고 직단(稷壇)은 서쪽에 두어 오곡(곡식)의 신을 각각 모셨는데 신좌는 그 북쪽에 안치하였다. 풍수에서의 향은 항상 지맥을 우선하여 판단하니, 인왕산으로부터 내려온 지맥을 기준으로 하여 등지는 향을 북쪽으로 자리 잡아 자침상 정남이 아닌 남동향으로 되어 있다. 

이곳에서 해마다 네 차례 왕이 직접 제주 역할을 하였다. 땅의 신(社)과 곡식의 신(稷)에게는 대제사(大祭祀)를 올렸고, 풍년을 기원하는 선농(先農), 좋은 베 생산을 비는 선잠(先蠶), 좋은 기후를 위한 우단(雩壇)의 중제사(中祭祀)가 있었다. 필요에 따라 때때로 기곡제(祈穀祭)와 기우제(祈雨祭)도 지냈다.

이 사직단 역시 역사의 파랑을 무사히 넘기지 못하였다. 원래는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으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중국이 하늘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요구하여 천제를 중단하고 토지의 신에게만 제사를 올려 왔다. 일본 강점기에는 우리나라의 사직을 중단시키고 그 격을 비하하기 위한 의도를 숨기고, 이곳을 일반에 공개한다는 미명하에 공원화하였다.

그로부터 지금까지도, 이곳에 대한 경외심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로, 그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심지어 애완동물과 함께 자유롭게 출입하는 장소로 방치되고 있다. 현재는 매년 10월에 '사직대제(社稷大祭)'라는 행사가 거행되고 있을 뿐이다.

천제의 부활을 꿈꾸며
조선을 개국한 후 한양 천도를 한 이성계는 ‘좌묘우사(左廟右社)’의 기본 원리로 경복궁의 좌측에 종묘를, 그 우측에 사직단을 설치하였다. 양택 풍수에서는 사회 통념과 달리 우측(무반)보다 좌측(문반)을 우위에 두는데, 그 예로서 우의정보다 좌의정의 품계가 높음을 들 수 있다.

한때는 천제와 토지제를 같이 지내던 사직단은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장소이다.  사직단을 궁궐의 우측에, 종묘를 좌측에 두는 고대의 도성 조영 원칙, 즉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이치
에 따라 조성하였다. 당연히 왕조의 조상 위폐를 안치한 종묘와는 격이 다르다.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북쪽을 높게 생각하여 남면하도록 궁궐을 배치했으므로,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인 동쪽에 종묘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을 배치하였다.

현재에 이르러서도 종묘는 한국 전통 건축의 대표적인 존재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반면, 사직단은 제단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주변 부속 건물들은 소멸하고 그 옛날 ‘신의 통로’였던 북문 앞은 공원으로 개방되어 누구나 신처럼 그곳을 거니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소중히 관리하고 복원하여야 할 장소는 환구단이다. 거대 자본주의로 말미암아 초고층의 또 다른 특급호텔의 뒷발치에 초라하게 서 있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서의 복원이 어려우면 장소를 옮겨서 재건하고 천제를 재개하여야 한다. 강제로 박탈당했던 정신문화 유산를 그 어느 것보다 우선하여 되찾아야 하리라 본다.

이에 반하여, 최근에 그곳에서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진 ‘광화문 광장’은 어느 나라의 건축물인지도 모를 정도로 정체성 없는 모습으로 탈바꿈되었으며, 그 결과 서울의 중심 요지를 커다란 콘크리트와 대리석 반죽물의 전시장으로 변모시켜 버렸다. 정체성이 모자란 사람들로 말미암아 정체성 없는 공간들이 자꾸 늘어나고 있으며, 막대한 예산만 허비하는 상황이다

일부의 유적들이 나라의 자존을 지켜내지 못한 나약하고 어두운 역사를 상징한다 하여 우리가 외면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 돈이 되는가의 여부를 따지는 부동산 개발 논리와 서양문화사대주의 그리고 거대자본주의는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가 숨 쉴 최소한의 공간마저 차지해버린 것이다.

우리의 현재는 과거의 연장선에 있다. 사직단의 존엄성을 재건하여 풍요로운 땅의 기운을 하늘에 올리고, 환구단을 부활시켜 우리가 부디 하늘의 뜻을 잘 헤아리는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하늘 제사를 드리는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기원할 뿐이다. 그리하여 토생금(土生金)으로 하늘과 땅이 상생하고 그 자식인 천손민족이 천지가 화합하는 기운으로 번영하여 나아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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