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이야기(칼럼)

궁궐 건축과 오행

풍수명인 2010. 3. 20. 00:27
2010년 3월 19일 (금)

역성혁명에 성공한 이성계는 도참사상에 의한 이씨(한양)득국설(木子得國說)을 현실화하여 그 정통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그 혁명을 도왔던 개경 토착세력의 기반을 붕괴시켜 왕권을 강화할 의도로 한양천도를 추진한다. 태조의 의중을 잘 파악하고 있던 하륜은 당시 공사 초기 단계였던 계룡산 신도안으로의 천도를 반대하고 무악(지금의 신촌과 연세대학교 일대)을 도읍지로 주장하나, 이 또한 그 국이 협소하다는 반대로 무산된다.

 

당시 왕사(王師)였던 무학대사는 북악산 아래의 명당을 왕궁터로 하자는 정도전에 맞서 인왕산을 등지는 터를 주장하였다. 북악산은 삼각형의 목(木)형이고 인왕산은 금(金)형이니 상대적으로 약한 북악산보다는 기가 더 센 인왕산을 택하여야 한다는 논리로, 금이 목을 쇠퇴(극)하게 함을 피하여야 하는 이치와도 같은 맥락이다.


북악산 자락의 터를 중심으로 보아 서북방의 허술함, 청룡으로서의 낙산이 백호인 인왕산에 비해 허약한 점, 그리고 북악산의 왼쪽 어깨너머에 있는 규산(窺山; 도둑이 숨어서 담장 안을 살피는 형국의 산)의 존재 등 취약 부분을 안은 채, 우여곡절 끝에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法宮)으로 건립되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앞서 설명한 ‘규산’을 보고 쾌재를 불렀다는 일화가 있듯이 이곳의 지리는 유독 외세 침략이 많았던 500년 조선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탑 위로 경복궁 내를 살펴보는 듯한 '규산'이 보인다.

 

1592년 임진왜란시 화재로 소실된 경복궁을 대원군이 중건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근정전 등 일부를 제외한 건물 대부분이 철거되었다. 1990년부터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시작으로 2025년에 완료가 예정된 복원사업이 현재 진행 중이다.


경복궁의 중심 공간인 광화문에서 흥례문,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을 거쳐 교태전에 이르는 부분은 기하학적인 대칭 구조로 이루어진 반면, 그 외의 공간과 건물은 비대칭 구조로 구성하여 균형 속의 불규칙이 혼합된 미를 도출해 냈다. 또한, 현대의 대부분 건축이 오행(五行)의 상생(相生)관계를 전혀 고려치 않고 이루어지지만, 옛날의 궁궐들은 건물 배치와 설계에 있어 철저하게 木, 火, 土, 金, 水 각 기운의 상호 보완 및 소멸 원리를 적용하고자 하였다.


신라시대 이후 우리나라 최대 성씨인 김씨는 오행상 金성이요 조선을 개국한 이씨는 木성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 두 성씨의 상호관계는 금극목(金克木; 도끼가 나무를 찍는 격)이 되니 원래의 ‘금(金)’씨를 ‘김(金)’씨라 부르게 함으로써 그 소멸(극)당함을 우회적으로 피하고 이(李)씨의 권위와 안녕을 도모하려 하였을 정도로 조선 왕실에서는 철저하게 오행사상을 신봉하였다 한다.

 

근정전의 오행


한창 공사 중인 광화문을 지나고 흥례문과 근정문을 통과하면 근정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광화문에서부터 문무백관의 조회와 나라의 공식행사 장소였던 근정전까지가 외궁이 되며, 여기서 다시 뒤로 사정문을 통과하면 편전(便殿)인 사정전(思政殿)으로 이곳부터 내궁의 영역이다.


매시간마다 있는 ‘조선시대 궁성문 개폐 및 수문장 교대의식’을 뒤로 하고 흥례문을 들어서면 근정문이 시야에 들어오고 양 문 사이에 어구(御溝; 수로)가 눈에 띈다. 궁내의 빗물(금천)이 흘러나가도록 서출동류(西出東流; 서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길)로 만들어져 있다. 외당수인 한강이 동출서류하니 내당수는 이를 반대로 역류하여 기가 오래 머무를 수 있게 하는 풍수적 역할을 하고 있다.

 

궁성문 개폐 및 수문장 교대의식

 

어구(御溝; 수로)

 

근정문

 

이 수로의 돌다리(영제교)를 지나고 근정문을 들어서면 2층의 월대(月臺)위의 근정전(勤政殿)이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곳을 오르는 정면 돌계단 난간과 모퉁이 등 요소에 돌로 조각한 4신상과 12지신상을 배치하여 각 신에 해당하는 시간과 방위에 따라 액을 퇴치하도록 하였다.


특이한 점은 화(火)산인 관악산의 불기운을 제압하기 위하여 계단 난간의 첫 귓돌(隅石)에   해태 석상을 조각하였고 그 옆에 무쇠로 만든 드므(소방용 물 저장용기)를 비치하여 수극화(水克火; 물로 불을 끄는 이치)를 꾀하였다. 관악산의 왕성한 화기를 막기에는 북악산의 산세가 미약하니 이를 여러 방법으로 비보(裨補) 하려 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근정전

 

                       

                                                        근정전을 오르는 정면 돌계단 

 

경복궁의 정전(正殿)인 근정전은 왕이 공식적인 대내외 행사나 의전을 치르던 곳이다. 정면과 측면이 각각 5:3의 비율로 비교적 정사각형에 가까우며 궁내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천정이 높은 고급 건물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내부에는 어좌(龍座)가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며 배치되어 있으며, 천정이 높고 원에 가까운 사각형의 형태이니 내부의 기가 모이는 공간 건축이다. 또한, 근정전을 둘러싼 행각(行閣)도 정사각형에 가까워 기가 집중되는 형태이다.

 

                                                                    근정전 내부 어좌 뒤의 일월오악도

  

                                                                    근정전 내부의 천정과 원형 기둥 

 

이 건물의 내외부에는 모두 원형 기둥을 사용하였는데 오행상 금(金)형으로, 원은 본래 하늘 또는 아버지를 상징하는 형태이다. 이 형태를 조선시대 궁궐에서 왕이 사용하는 건물 기둥으로 채택하였는데, 왕을 용(龍)이라 칭하기도 하였으니 그 생김새와 유사한 둥근 모습이었으리라 본다. 대부분의 궁궐 건축물 바닥이 네모꼴의 土형이니 여기에 원형 기둥을 써서 토생금(土生金)으로 서로 조화롭게 생하게 하였다.


반면, 궁궐 내에서 신하들이 사용하는 건물과 일반 사가(私家)의 가옥에서는 원형 기둥의 사용을 엄금하여 왕기(王氣)의 생성을 막아왔다. 예외적으로, 사찰에서는 원형 기둥의 사용을 허가하였는데 절에서는 후손이 태어날 여지가 없어 왕권에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조선시대 한옥의 구조가 좌우로 길고 앞뒤 거리가 짧은 “ㅡ”자 꼴이거나, "ㄱ"자 또는 “ㄷ"자 등의 모양으로 축조되어 있음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이는 오행상 ‘木’에 해당된다. 이에 대한 양택적인 해석은, 집 내부의 기를 양끝으로 분산시켜 뭉치게 하니 서로 대립하는 좌우 파당을 만들게 하고, 木형 집을 땅 위에 지으니 ‘목극토(木克土)’로서 집이 땅을 쇠퇴시킨다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근정전과 주변의 행각을 정사각형에 가깝게 건축하는 등 당시의 품격있는 풍수적 설계 수준이 한껏 돋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궐내에서 신하들이 사용하는 건물과 백성의 가옥도 오행의 풍수적 이치에 맞게 짓도록 하는 가벼운 배려만 하였어도, 치열한 당쟁으로 말미암은 폐해를 막고 좀 더 백성이 윤택하고 화목하게 살 수 있었을 것으로 추론해 본다. 왕권을 지키기에만 전념함을 뛰어넘어, 왕실과 반상(班常)을 함께 어우르는 좀 더 큰 정치를 하지 못하였음이 아쉬워 보이는 대목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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