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이야기(칼럼)

숫자와 건축

풍수명인 2010. 3. 27. 22:29
2010년 3월 27일 (토)

전편에서의 경복궁 외전(外殿)인 근정전을 뒤로하고 사정문을 들어서면 왕이 평상시 거처하고 신하들과 정사를 논하던 사정전(思政殿)이 있다. 이 공간은 왕의 편전(便殿)이었으며 좌측에 동편전인 만춘전(萬春殿)과 우측에 서편전인 천추전(千秋殿)이 각각 자리하여 사정전을 보좌하는 기능을 한다.

 

사정문은 원형 기둥을 사용하여 중앙 통로의 폭을 넓게 축조함으로써 왕의 출입통로로서의 권위를 반영하였다. 사정전 또한 근정전과 마찬가지로 원형 기둥으로서 건물 사방의 각 기둥 간의 간격중 중앙 부분을 넓게 할애하여 내부 공간의 기가 중앙에 집중되도록 하였는데, 그 비율이 전*후면은 2:2:4:2:2이고 측면은 2:4:2이다.

 

 

                          사정전:  기둥 사이의 칸 수가 홀수(5X3)이다.

 

참고로, 이태리의 건물이 원에 가까운 정사각형으로 사방의 각 기둥 간격이 1:2:1의 비율이고, 중요 건축물은 원형 돔식 지붕을 하고 있으니, 이러한 건축 양식이 천 년 동안 로마가 대 제국이었던 원동력 일부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세계적으로도 가장 기의 순환과 집중에 유리한 건물 구조로 평가받는다.


만춘전과 천추전은 사각기둥으로 지어졌음을 볼 수 있는데, 왕을 보필하는 건물 공간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이 두 건물의 기둥 중 양끝의 기둥 사이만 좁고 나머지 중앙 기둥의 간격이 일정하게 넓다는 것이다. 왕을 보필하는 일은 대립이 있을 수 없고, 정사를 논하는 측면에서는 폭넓은 의견 대립이 가능하도록 절묘하게 공간 배분하였음을 짐작게 한다.

 

 

 

                         천추전: 기둥 사이의 칸 수가 짝수(6X4)이다.

 

우리의 일상사는 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령, 주불쌍배(酒不雙杯; 술 마시는 잔의 수효가 짝수가 되지 않아야 함), 제사에서의 재배(再拜)와 삼헌(三獻), 행운의 7, 중국 황실을 상징하는 9, 완성의 숫자 10 등 그 예는 수없이 많다. 오행과 각 방위의 숫자로는, 水는 북쪽이고 1과 6, 火는 남방이며 2와 7, 木은 동쪽으로 3과 8, 金은 서방위로 4와 9 그리고 土는 중앙으로 5와 10에 각각 해당한다. 그리고 각 오행과 방위마다 홀수와 짝수를 고르게 하나씩 배속시켜 균형을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건물 외벽의 기둥과 기둥 사이를 하나의 칸(공간)으로 보면, 왕의 집무 공간인 근정전이나 사정전 그리고 침전인 자경전과 교태전의 외벽 칸이 모두 홀수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짝수는 음수(陰數)로서 기가 대립하고 나누어지는 흉함이 있으며, 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홀수는 양수(陽數)이고 집중과 통일을 의미한다 하겠다.

 

그러므로 왕이 사용하는 공간에서는 기의 분산이나 대립을 피하고 중앙에 집중되도록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하겠다. 여기에서도 일반 신하들이 사용하는 건물 외벽의 칸 수는 짝수이거나 짝수와 홀수가 난잡하게 혼합되어 왕과 관련한 건물과의 차별을 두고 있다.


마찬가지로, 공사 중인 광화문을 제외한 흥례문과 근정문 등은 3칸으로 하고 기타 공간의 소 통로는 한 칸으로 하여 홀수의 효과를 꾀하였다. 또한, 경복궁의 출입문중 흥례문, 근정문, 사정문 역시 원형 기둥을 써서 왕(용)기를 성하게 하였다. 반면, 침전 출입문인 향오문과 양의문은 사각기둥을 사용하였다. 아마도 깨어 있는 일상 시간에는 왕의 기운을 왕성하게 하였지만, 잠자리에서는 왕 이외의 다른 용의 존재와 왕기의 생성을 용인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사정문의 원형기둥 

 

                                양의문의 사각기둥

 

사정전 뒤에 있는 향오문을 들어서면 이곳부터 경복궁의 침전영역으로 왕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의 모습이 먼저 나타난다. 앞서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이 건물의 정면과 측면의 기둥 간 공간(칸)이 각각 11과 5의 홀수로 건축이 되어 있음을 볼 수 있으며, 역시 중앙 부분의 기둥 간격 비율이 중앙이 4이고 중간이 3으로써 가장자리 2보다 넓게 구획되어 있다.


특이한 바는, 강년전은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이다. 이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에서도 동일하게 목격할 수 있는데, 왕이나 왕비의 잠자리 위에 다른 용이 오르지 못하게 하려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건물을 지을 당시 용마루를 올리지 않는 대신 내부에 간격을 두고 두 개의 종도리(용마루와 서까래를 지탱하는 버팀목)를 나란히 배치하여 서까래를 지지하는 독특한 공법이 사용되었다.

 

                           

                          용마루가 없는 강녕전(위)과 교태전의 지붕

 

강녕전을 뒤돌아 양의문을 통과하면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交泰殿) 영역으로,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던 공간이다. 모든 궁궐의 영역 중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며 축조되었는데, 풍수적으로 볼 때 교태전의 북쪽 북악산으로부터 유입된 생기가 침전 내부에서 결혈(結血)하니 대를 이을 왕자의 생산에 온 정성을 쏟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왕비의 침전답게 건물 뒤뜰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는데, 특히 그곳의 아미(峨嵋; 미인의 눈썹처럼 아름다움)산 굴뚝에 십장생 문양의 조형미가 돋보인다. 원래는 평지였으나 경회루 연못을 파면서 나온 흙을 이곳에 성토하여 작은 동산을 조성하였는데, 아마도 생기가 마지막으로 유입되는 중요한 맥로를 덮어 보호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미산(정원)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 무엇보다 무서웠던 것은 인간의 계략이었다. 일제강점 초기에, 불에 타서 사라진 창덕궁의 침전을 다시 지을 건축재를 조달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명목으로, 가장 막중한 장소라 할 수 있는 조선 법궁인 경복궁의 왕과 왕비 침전이 뜯기는 수모와 유린을 당하였으니 말이다. 그 후 1995년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강녕전을 복구하였다.


조선 왕조가 일반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궁궐 구석구석까지, 오행설에 입각해 왕실과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기울였으나, 백성을 왕실과 아울러 하나 되게 하지 못함으로 인한 결과는 실로 처참함이었다. 멀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가깝게는 일제강점기의 서막으로 이곳에서 자행되었던 명성황후 시해사건 등 왕실과 경복궁에 가해졌던 수모를 차라리 망각할 방도는 없는 것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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