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이야기(칼럼)

경복궁의 뒷모습

풍수명인 2010. 4. 17. 12:54

2010년 4월 17일 (토)

조선 왕조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지키려 했던 왕권이 고종의 대한제국에 이어 일제 강점으로 상실되기까지의 과정을 오행설을 포함한 풍수사상으로 분석하고 추론해 보는 일은, 앞날을 설계하여야 하는 우리에게 교훈적인 의미로서 중요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움직이는 생물체에만 상호 대립이나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이치가 통하는 바가 아니라, 산과 강 등의 자연 또는 건축물에도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라 하겠다.


경회루와 근정전의 대립


왕의 침소인 강녕전 서쪽에는 경회루(慶會樓)가 웅장한 모습으로 연못과 함께 자리하고 있으며 외국 사신이나 신하들과의 연회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경복궁 창건 당시 작은 누각이었으나 태종 12년에 지금과 같은 규모로 확장하여 통영의 세병관, 여수의 진남관과 함께 그 규모에 있어 3대 목조 건축물로서 국내에서는 그 크기를 능가할 건축물이 없다.


화(火) 기운이 강한 경복궁 터에서 화재시 소화용수를 저장할 용량을 고려하여 연못의 규모가 결정되었다 한다. 또한, 모자라는 명당수(明堂氺)를 확보하고 궁터의 습지를 효과적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조성함과 아울러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로서 물을 신성시 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반면, 집(울타리)안에 연못을 두어 수기를 왕성하게 하면 가족이 병(중풍)을 앓게 되는 등 여러 폐해가 있다 하여 궁궐과의 사이에 이중 담을 설치하여 수기 침투를 막고자 하였다.

                    경복궁의 침전영역과 경회루 사이의 이중 담 


경회루는 세 개의 돌다리로 연결되는데 하부는 안쪽 24개의 원형 돌기둥과 외부에 24개의 사각기둥을 둘러 천원지방(天元地方)의 사상을 나타내고 있으며, 24의 수는 24절기와 24방위를 상징하는 유가(儒家)의 세계관을 표현한다. 연못에는 경회루 자리를 포함한 3개의 방형 섬을 조성하였는데 이는 삼신(三神; 한인 한웅 단군)사상에서 유래한다고 본다. 

                    누각의 외부는 사각기둥이고 안쪽은 원형기둥이다.


경회루전도에 의하면, 화기를 누르기 위하여 경회루가 육육궁의 원리에 따라 지어졌다고 적혀 있다. 수(氺)의 숫자는 1과 6이고 그 중 6은 큰물을 의미하는 수이니 경회루를 구성하는 공간과 구조부재의 개수 등이 6궁의 원리에 따랐다는 것이다. 또한, 물과 불을 능히 다스리는 청동용 두 마리를 경회루 연못 북쪽에 넣었다 한다. 북쪽에 용을 넣어 생성되는 물로써 불을 제압하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경회루의 팔작지붕 내림마루에 배치한 잡상 개수가 11개인데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등의 형상이다. 반면, 근정전은 7개, 덕수궁 중화전은 10개, 숭례문은 9개이니 잡상의 수에서 경회루는 정전인 근정전보다 월등히 많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왕은 파천(播遷)하게 되니, 뒤이어 실망한 난민들에 의하여 경복궁은 터만 남긴 채 소실되었다. 역대 왕들은 그 재건을 도모하였으나 제반 여건이 어려워 실행 에 옮기지 못하다가 270여 년이 지난 조선 말기에 흥선대원군이 당시 섭정(攝政)을 하던 신정왕후에게 그 중건을 건의하여 경회루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 당시에 왕실의 권위를 회복한다는 명목하에 경복궁 중건 비용을 조달하고자 원납전(願納錢; 스스로 원해서 납부하는 돈)을 강압적으로 징수하고 당백전(當百錢; 조선의 기존 화폐인 상평통보에 비하여 100배의 가치가 있는 돈)을 남발하여 물가가 폭등하는 등 경제적인 혼란을 가져오고 백성에 대한 무리한 노동 징발로 그 원성이 자자하였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당시 경회루를 포함한 경복궁이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나, 풍수적으로 보면 정전(正殿)인 근정전과 비등하게 경회루의 규모가 지나치게 크게 중건되어 두 건물 간의 기의 대립을 가져왔다고 추론한다. 조선의 정치적인 중심 공간이 경회루에 쏠렸던 대표적인 예는 연산군 시대이리라 본다.


연산군은 경회루에 수 많은 기생을 동원하여 이른바 ‘흥청망청(“興靑”은 연산군과 잠자리를 한 기생을 칭함이고, 결국에는 망하고 만다는 의미)’ 음탕한 연회를 벌이며 말 잘 듣는 신하는 충신이라 하고 진언하는 신하는 역적으로 몰아 가혹한 형벌을 서슴지 않았던 정치 놀음의 현장이 되었으나 ‘중종반정’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일반 가옥에서조차 둘 이상의 대등한 건물을 지어 기의 대립과 갈등을 일으키는 흉한 가상(家相)은 피하여 왔던 반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시작된 근정전과 경회루의 기 싸움은 조선 말기에 일어난 왕실 내부의 대립과 암투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흔히,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에서만 이런 기의 원리가 작용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자연의 지형지물과 건축물 간에도 같은 이치가 적용된다.


                          연못에 경회루를 포함한 세 개의 섬을 조성하였다.

조선 후기의 건축에서 자주 보는 팔작지붕은 목(木)과 토(土)의 기운이 서로 극하는 형상으로 용마루 양끝에 위로 솟은 취두(鷲頭)는 기운의 대립을 더욱 성하게 하는 흉상이다. 현대에서도 그 예를 볼 수 있는데, 모양이 같은 쌍둥이 건물이나 서초동의 언덕에 나란히 지은 대법원과 대검찰청 건물이 있다. 아마도 요즈음 법원과 검찰이 대립을 하는 원인이 청사 때문이라고 한다 해도 무리한 추론은 아닌 듯싶다.


제 위치를 지키지 않음의 결과


1868년 고종 5년 경복궁 중건 후에 왕실이 입궐하고 얼마 안 있어 대원군에 대한 명성황후의 대립으로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종식하고 친정을 선언하게 된다. 이 해에 고종은 내탕금(왕의 사비)을 투입하여 경복궁 북쪽 일대에 일반 사대부 가옥형식의 건청궁(乾淸宮)을 지어 1884년부터 벽돌식 건물인 집옥재(集玉齎)에서 집무를 하는 등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여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궁(宮) 안에 또 다른 궁이 있을 수 없으니 ‘00당’이나 ‘00전’으로 명명하여야 함이 마땅한데도, 워낙 고종의 독립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건청궁

실제로 고종이 건청궁에 입궐하고서 흥선대원군은 정치적으로 쇠퇴하게 된다. 그러나 1895년 일본이 건청궁에 난입하고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고종의 근대화 의지는 여지없이 꺾이게 된다. 이를 계기로 고종은 조선 초기 태조가 그토록 심사숙고하여 자리 잡고 지키려 했던 경복궁 터를 떠나 아관파천에 이어서 덕수궁에 중화전을 건립하여 경술국치 전까지 국가적인 공식 공간인 법궁으로 사용하게 된다.


땅의 기운이 응집한 혈에서 조금만 멀어져도 그만큼 기의 영향력이 현저하게 감소하므로, 음택풍수에서는 정확한 혈자리를 찾고 산소를 쓰고 그 자리를 적정하게 지키고 있느냐 하는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다룬다. 사실 왕비의 침전인 경복궁의 교태전은 서울의 주혈(主穴)이니 풍수적으로 그 중요성이 막대하다 하겠다. 바꾸어 말하면 국가적으로 중요한 곳을 지키지 못하고 유랑 생활을 하였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하는 기본 이치를 지키지 못함이 망국의 한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순전히 정치적 목적으로 옮긴 도읍지와 왕궁이었지만 그곳을 중심으로 500여 년 역사가 전개되는 동안, 위태로우면서도 어렵게 지켜왔던 나라였으나, 자리를 비움에 대한 대가는 너무 가혹하였다고 본다. 관악산의 화기 때문인 잦은 화재, 서북방이 허술하여 치렀던 병자호란과 내정간섭, 궁궐 내에서의 건물 간 기의 대립을 닮은 왕실의 분열, 동쪽 청룡의 허약함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그 방향에서 쳐들어온 세력으로 말미암아 망국하게 되는 조선의 역사를 보며, 후세에 전하는 가르침이 많다고 애써 위안을 삼아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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