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이야기(칼럼)

구름 속에 사는 새의 지혜

풍수명인 2010. 5. 1. 01:04

전라남도 구례군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직선거리 5km를 못 미쳐 집터로서 명당이라는 ‘운조루(雲鳥樓)’가 있다. 1776년부터 6년에 걸쳐 지은 이 고택은 중요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되어 조선시대의 사대부 가옥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풍수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둘러보고 싶었던 곳이기에 얼마 전 봄날 화견례(花見禮)를 겸한 남도 행을 하였다.


‘운조루’라 함은 택호로서, 원래는 큰 사랑채 누마루의 이름으로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 사는 집'과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710평의 대지에 처음 지을 당시 78칸의 규모였으나 지금은 모두 63칸이 남아 있고 건물의 평수는 129평이니 고택으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이리라 본다.

                          운조루와 뒷산

 

많은 사람이 풍수적으로 또는 들어서 아는 지식 차원에서 운조루를 대단한 양택 명당으로 인식하고 평가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범하기 쉬운 실수는, 과거와 현재의 이면(裏面)을 간과한 채, 현재의 모습만으로 전체를 알려고 함이다. 남들이 대단히 좋다 하니 따라서 ‘우리나라 제일의 집터’라고 평가하는 식이다.

단지 그곳의 지형지물과 현재 상황 자료만으로 풍수적 판단을 하는 좁은 사고를 넘어 그 안목을 넓혀야 하고, 거기에 관련한 사람의 작용을, 더 나아가 필사적인 ‘터 주인의 노력’을 반드시 알아채야 한다. 풍수가 우리에게 한층 흥미롭고 유익한 지혜를 제공하는 대상인 이유가 사람의 행위와 불가분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풍수로 보는 가옥

조선 영조 52년 유이주(柳爾胄)옹이 낙안군수로 있을 때 운조루를 건축했다고 하는데, 큰 사랑채와 안채가 주요 부분이며, 그 밖에 중간 사랑채, 행랑채, 사당, 연지(蓮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옥 전면의 수로와 길 건너에 연지를 조성하였고 안채 북동쪽에 사당이 있으며, 동과 서의 행랑채 사이에 편안하게 들고 날 수 있는 문턱 없는 솟을대문이 있다.

운조루는 조선 후기 사대부 주택의 형태를 잘 간직하는 몇 안 되는 건축물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중간 사랑채 한쪽 끝의 우진각 지붕이 올려다보이고, 큰 사랑채의 서쪽 끝은 팔작지붕이다. 그 외에는 모두 오행상 좋은 기운이 흐르는 맞배지붕이고 홑처마 집이다.

행랑채와 사랑채는 각각 -자와 ㅜ자형으로 배치하였고, ㅁ자 형태의 안채는 애초 경상도 대구 출신의 창건주가 거기에서 보아왔던 상류층의 가옥 배치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상류층 집은 -자, ㅜ자, ㄷ자, ㅁ자의 형태를 갖추어 실내 기의 집중에 불리하나, 당시 주류를 이루는 가옥 배치이니 그 길흉을 판단함은 별 의미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오미리 마을의 지리

지리산을 관장하는 산신은 노고(老姑=노파)이고 산신제를 지내던 곳이 노고단(老姑壇)이니, 다른 어느 곳보다 노고단이 지리산 일대를 관장하는 중심이다. 여기서부터 오미리 마을의 주산인 형제봉을 거치며 주맥이 흐르다 마을 뒷산을 못 미쳐 우로 방향을 틀어 입수하였으니 오미리 서쪽에 있는 사도리 마을을 주혈처로 본다. 그중 일부가 오미리의 운조루로 유입되었는데, 뒷산이 다정하게 마을을 품은 형국이다.

오미리의 서쪽에서 섬진강까지 뻗어 내린 백호는 사도리의 청룡이 되는데, 사도리 마을 앞에서 섬진강과 서시천이 합수(合水)하니 좋은 기를 청룡이 새어 나가지 못하게 막아 서 있다. 반면, 오미리 마을에서는 동쪽 왕시리봉 산자락이 청룡이 되나 짧게 뻗어 내려 수구를 잘 관쇄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사도리에 정을 주는 섬진강이 오미리에서는 열려 있는 수구 쪽으로 흘러나가고, 명당수는 운조루 앞에서 완만하게 들판을 흐른 후 섬진강으로 빠지니 재물에 불리한 국세이다. 동쪽 문수재에서 흐르는 물줄기도 멀리서 운조루를 등 돌리고 흐르다 파구처(물 빠지는 곳)에서 외당수와 합수하니 기의 축장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고택 앞의 오봉산은 둥근 금성(金星)체로 들판에 나락을 쌓은 다섯 개의 노적사(露積砂)의 형국이니 부(富)를 부르고 있다. 그 왼쪽으로는 단아한 문필봉이 자리하니 학자나 과거급제자와 같이 집안의 뼈대를 지탱할 인물을 배출하는 안산을 마주하고 있다. 이 앞산이 잘 보이도록 운조루 세 곳에 누각을 배치하여 좋은 기를 잘 받을 수 있게 한 가옥 설계가 돋보인다.

창건주(創建主)의 지혜

이처럼 오미리에 운조루가 들어서기 전의 지리 여건을 살펴본 결과는, 부족한 지리 여건들이 혼재하니 상급지의 명당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물길이 집터에 불리하게 작용을 하고 있음을 고택의 터를 잡은 창건주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오미리 마을에서의 풍수 하이라이트는 운조루의 앞을 흐르는 개울이다. 마을 동쪽 위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을 마을 앞으로 유정하게 지나도록 인공 조성하여 섬진강의 흐름에 반대되는 수태극을 만들었다. 미루어보아 당시 마땅한 중장비도 없던 시절에 상당한 노력과 자재를 투입한 흔적이 남아있다. 또한, 그 물(재물)이 오래 머무르도록 중간에 연못과 저수지를 조성한 현인(賢人)에게 찬사와 경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 따라 직사각형의 못과 원형의 섬으로 연지를 축조하였는데, 맞은편에 보이는 오봉산(五峰山) 삼태봉(三台峰)이 화(火)산이어서 화기를 막기 위한 것으로 전해 온다.

그러나 앞산을 온전한 화산으로 보아 그 기를 수기로 제압하려던 생각보다는 물을 모아 재물이 고이는 효과를 더 의도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한다. 더구나 오봉산은 구불구불한 수(水)형산이며 앞산의 삼태봉은 화산보다는 삼각형의 목(木)산에 가깝다.

 

오봉산

 

문필봉(목산)

 

오미리 마을 앞 들판이 섬진강 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었으니 재물과 생기가 운조루에서 멈추지 못하고 흘러나가는 지형이다. 따라서 이곳의 물은 뒷산으로부터 흘러온 생기를 더는 새어나가지 못하게 차단하여 집안에서 맴돌게 하니(혈 비보), 인공으로 만든 이곳의 연지는 대단한 길사(吉砂)임이 분명하다. 운조루 창건주(創建主)의 뛰어난 풍수 식견과 비범한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개울과 저수지

 

운조루 앞 연지

 

다음은 일본강점기에 무라야마(村山智順) 라는 사람이 쓴 <조선의 풍수>의 일부 내용이다. 구례군 토지면 금내리 및 오미리 일대에 1912년쯤부터 이주자들이 모여들었다. 전국 각처에서 상당히 지체 높은 양반까지 와서 집을 짓기 시작하여 현재(1929년) 이주해 온 집이 일백여 호이고 계속 증가 추세에 있다.

비기(秘記)에 말하기를 이곳 어딘가에 '금귀몰니(金龜沒泥; 금거북이 진흙 속에 숨어 있는 곳)' '금환락지(金環落地; 하늘에서 금반지가 떨어진 곳)' '오보교취(五寶交聚; 다섯 가지 보물이 숨겨져 있는 곳)'의 세 진혈이 있어 이 터를 찾아 집을 짓고 살면 힘들이지 않고 천운을 얻어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전해온다. 이 세 자리 중 오보교취 자리가 제일 좋은 자리라 한다.

이곳 오미리의 유 씨 집이 가장 오래되었는데, 그 택지는 유 씨(柳氏)의 원조 유부천(柳富川)이란 사람이 지금부터 300년 전 즈음에 복거(卜居; 풍수적 집터 잡기)한 것이라고 전한다. 그가 집의 초석을 정하려 할 때 지금의 부엌 바닥 자리에서 귀석(龜石; 거북 모양의 돌)을 출토했는데 비기에서 말한 금귀몰니(金龜沒泥)의 땅이라는 것을 알고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곡전재

또 하나인 금환락지(金環落地)는 운조루에서 들판으로 조금 내려온 ‘곡전재(穀田齋)’라는 부농 저택이라 전해진다. 오미리 마을의 취약 부분인 물길을 극복하기 위하여 역시 이 가옥도 필사적인 ‘물 붙들기 노력’을 기울였다. 바깥마당에 물을 끌어들여 구곡수(九曲氺; 구불구불 흐르는 물)를 만들고 안채 옆에는 아예 커다란 연못을 만들었다. 

 

                     곡전재 안채 옆의 연못

 

                          바깥 마당의 구곡수

위 두 명당과는 별도로 남아 있는 한 곳 오보교취 명당을 의식하고, 일제강점기에 많은 가구가 몰려와 거주하다 또 그만큼 빠져나갔던 기록이 있다.

모두가 명당이라고 자리하여 살아보았으나, 운조루나 곡전재의 경우와 같이 부족한 지리를 개선(비보)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실망하여 다시 떠나갔으리라 본다.

상생을 통한 보국(保局)

운조루의 주인은 다른 사람들과의 상생(相生)이라는 방법을 택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지리의 약점을 훌륭하게 보충하는 효과를 도출하였다는 생각이다.

6·25 전쟁 때 공산치하를 경험했던 연령층은, 평소에 모나게 행동한 연유로 전란이 일어나 이웃들에 의하여 밀고를 당하고 총살되는 마을 유지와 인심을 잃은 사람들을 거울삼아 평소의 언행을 자제하고 삼가라고 당부하곤 하였다.

이곳 사람들은 한때 밤에는 빨치산 낮에는 국군의 세상이라던 지리산 자락에서 밤과 낮으로 약탈의 대상이 되어 숱한 고초를 겪었으리라 짐작한다. 여순반란사건, 6·25전쟁전쟁 그리고 긴 고난의 시간으로는 일제강점기가 있다. 특히 마을 유지나 지주는 당시 제일 먼저 처단해야 하는 존재로서 빈곤층의 한풀이 대상이었던 시절을 운조루 사람들도 예외 없이 살아야 했을 것이다.

운조루 사람들이 전란 중에 희생된 자 없이 무사했던 연유가 ‘타인능해(他人能解)’ 정신이다. 운조루에 있는 200년 된 뒤주의 마개 부분에 쓰인 문구이다. 이 뒤주로 운조루는 더욱 유명해졌으며 그 정신에 관하여 수없이 회자(膾炙)하고 있다. 이 집안의 상징인 뒤주는 사랑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문간에 있는데 ‘외부인 누구나 이 쌀독을 능히 열 수 있다.’라는 의미이다.

 

'타인능해' 뒤주

부농이었던 운조루에서는 식량이 없는 사람은 누구든 이 뒤주를 열고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했으며, 뒤주의 위치도 가져가는 사람을 배려하여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두었다고 전한다. 또한, 78칸 규모의 사대부 가옥이지만 굴뚝을 아주 낮게 하여 밥 짓는 연기가 외부에서 보이는 것을 막아 끼니를 때우기 어려운 시절 이웃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한 자취도 보인다.

처음에는 이 뒤주에서 가능한 많은 양의 쌀을 가져가려 하였을 것이나, 뒤에는 항상 뒤주가 채워져 있음을 보고 먹을 만큼만 취하게 되었다 한다. 나중에는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쌀을 가져가지 않게 되었으니, 매월 그믐에 이 집의 어른은 뒤주를 점검하여 다 비워지지 않았을 경우 큰 며느리에게 큰 꾸중을 하였다고 전한다.

지난 근대사에서 겪었던 전란으로 인근 마을의 부호들은 끌려가 죽임을 당하였으나, 이곳 운조루의 사람들에게는 타인능해라는 ‘가진 자의 철학’이 가문의 수호신 역할을 한 셈이다. 오늘날에도 부자들의 의무와 처세함에 있어 꼭 필요한 교훈이 되고 있다.

운조루 사람들은 지리적인 터 또는 고택에서 나오는 발복으로 별 수고함이 없이 편안한 생활을 하기보다는, 근면과 노력으로 가풍을 지키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왠지 있어야 할 존재가 없는 한구석 허전함을 느끼며 고택을 뒤돌아 나왔다. 바로 이 집의 창건주인 유이주옹이 무릎에 어린아이를 올려놓고 있는 그림을 떠올리게 된다.

예로부터 어린아이들은 터의 기운과도 민감하게 교감하니 좋은 기운이 맴도는 자리에서 출산하고 키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요즈음 열병처럼 앓는 농촌의 젊은 층과 딸린 아이들의 기근 현상이 이곳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이리라 생각해 본다.

산천이 주는 기가 중요하지만, 그 기운을 잘 받아서 배가시킬 수 있는 생동감 넘치는 사람의 생기도 절실함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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