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이야기(칼럼)

자체 발광(發光) 1

풍수명인 2010. 7. 31. 18:51

최근 연예인의 아름다움을 ‘자체 발광’한다고 표현하는 인터넷 기사를 종종 본다. 아마도 외모에 치중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는 듯하다. 지나간 역사 속에서 그 단어에 대한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흔히 권력자나 재력가 등 성공한 사람을 비추는 조명이 밝을수록 뒷면의 어두운 그늘이 짙어질 수밖에 없는 상반되는 이치가 우리 사회의 보편적 현상이다.

이루는 과정에서 부작용이 있거나 성공 후 사회에 대한 배려가 소홀함이 주된 원인이라 하겠다. ‘부자가 천국 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라고 하거나 ‘부자는 3대가 유지되지 못한다.’라는 표현이 있듯이, 우리 사회는 빈부의 양극화가 심화하여 특히 돈 많은 자에 대한 대중의 시선이 곱지 않으며 부의 축적과정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어떤 이들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밖으로부터 비치는 조명을 넘어서 자기 내부로부터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가 된 예도 있다. 자체 발광체(發光體)란 태양처럼 그가 속한 사회와 자신 뒷면의 어둠까지도 밝게 비춘다는 의미이다. 사회 하부층과 눈높이를 맞추고 상생하는 겸허함과 비움이야말로 그 지름길이라 하겠다.

경주 최 부자

얼마 전 ‘명가(名家)’라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다. 14세기부터 경주 땅에서 자리하고 부를 쌓아 ‘경주 최 부자’라고 불리던 가문을 소재로 한 시리즈이다.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이룸으로 찬란한 조명을 받아 온 유명 인물이 상당수이지만, 400년의 역사 속에서 집단인 가문 전체가 줄곧 각광을 받은 예는 매우 희귀하다. 더 나아가 이들은 자체 발광하며 모든 방향을 또한 밝게 조명하였으니, 아마도 그 사례가 유일무이하다 하겠다. 

우연히 어느 한 장면을 본 후로부터 그 드라마를 흥미롭게 시청하게 되었다. 주인공인 아들 최국선(1631~1682년)은 가문의 부를 정당한 방법으로 축적하기 위하여 노력하여 온 한편, 이와는 현실과 이상에서 이견을 보여 왔던 아버지 청백리 최동량은, 이제까지는 청빈(淸貧)만이 좋은 줄 알았으나 아들을 통하여 청부(淸富; 깨끗한 부자)도 괜찮은 것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술회하는 대목이다. 장유유서 사상이 철저한 조선 시대에, 아랫사람에게서 깨달음을 얻고 배울 수 있는 겸허한 가풍을 엿보게 되었다.

경주 최씨 가문 

<정무공기실(貞武公紀實)>을 보면, 경주 최씨 정무공파의 시조인 최진립(崔震立,1568~1636 년)공은 임진왜란 당시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 진출한 왜군을 밤에 급습하여 화공으로 패퇴시키고 그 일대에서 동생 최계종과 함께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큰 공을 세운다. 그 공으로 무관직에 제수되고 연이은 영남 인근에서의 수많은 전공으로 선조의 총애를 받게 되며 나중에는 삼도수군통제사와 전라수사에 벼슬이 이르게 되었다고 적혀있다. 

또한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보면,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당시, 공주영장이었던 최진립 장군은 예순아홉의 나이로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임금이 포위되어 있는 남한산성을 향해 군사를 몰아갔다. 그러나 전투는 중과부적이었으니 용인 험천전투에서 조선군대는 청나라 철기병에게 패퇴했다. 모든 장수가 퇴각했지만 최진립 장군은 끝까지 항전하다 그 해 12월 27일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듬해 인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정려각을 내린다. 두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니 인조를 포함한 역대 왕들은 네 번에 걸쳐 사액 제문을 지어 그를 추모했다. 이처럼 최진립 공은 경주 최씨 가문을 일약 명문가의 반열에 오르게 하였으며 그의 장렬한 전사와 북벌론의 대두로 자신은 국가적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다. 

또한, 나라에서는 그의 제사를 불천위(不遷位; 생전에 큰 공훈을 세워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로 한 신위)로 지정하였다. 경주 내남면 이조리의 <용산서원>에 최진립 장군의 신위를 봉안하였으며 숙종 37년 임금이 친히 '숭렬사우(崇烈祠宇)'로 사액한 사당이 되었다. 당시 무신을 위한 사당으로 사액이 내려지기는 이순신과 김시민 장군의 전례가 있을 뿐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의 추모 열기가 대단히 거국적이었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로 <최진립 신도비>가 있다. 규모에서 웅장함도 있지만, 더 의미 있는 것은 극심한 당쟁의 시대에도 당파를 뛰어넘어 각파가 신도비의 구성에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서원기는 실학자 이익(李瀷)이 추서하였으며 묘액은 당대 최고 서예가인 옥동(玉洞) 이서(이익의 형)가 썼고, 그리고 신도비의 비문은 남인 조경(趙絅)이 짓고, 발문은 노론파의 관찰사 조명겸(趙明謙)이, 비의 음기는 서인 윤심지가 쓴 기록이 있다. 

최진립 공이 전쟁터를 누빌 때 옥동과 기별이라는 노비가 항상 붙어 다녔다 한다. <동경지>에 따르면 옥동은 임진왜란 당시 순절할 위기에 처한 최 공을 구해 낸 바 있고, 기별은 노령인 주인을 끝까지 따르다 용인 험천에서 최 공과 함께 온몸에 청군의 화살을 맞으며 순직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런 이유로 경주 최씨 정무공파 문중에서는 최진립 장군의 기제사를 지낸 후 바로 뒤이어 제사상을 마루로 옮겨 생시에 주종이었던 서로를 만나게 하고 두 노비를 모시는 제사를 지낸다 한다. 주변의 양반가에서 노비의 제사를 같이 지낸다 하여 말이 많지만, 장군과 두 종이 한몸이라고 생각하고 수 백년 동안 그렇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최 부자 집의 의리와 우직함이 돋보이는 대인의 자세와 노비에게도 절하고 배우는 겸허한 처세가 돋보이는 내용이다.  

부(富)의 철학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치른 후, 사회적인 혼란 속에서의 당시 보편적인 재산운용방식은 돈이 궁한 사람들로부터 헐값에 전답을 사들여 부를 늘리는 형태였다. 경주 최씨 가문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최진립 공 당시에 8명이던 하인이 그의 아들 대에서는 40명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토지재산은 이보다 훨씬 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그 후 최 공의 손자인 최국선 옹은 예상치 못했던 사회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호구지책으로 앞뒤 구분 못 하고 땅을 팔아 끼니를 이었던 한 맺힌 사람들이 조직한 ‘명화적(明火賊; 불을 밝게 비추고 공공연하게 도적질을 한다는 의미)’이라는 도적떼가 최씨의 집을 야간에 급습하였다. 

이들은 특이하게 문서들을 빼앗아 소각시켜 없애고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기는 하였으나 인명 피해는 발생시키지 않는 선에서 한풀이하는 식으로 최씨 집안에 상당한 피해를 주는 사건이 일어난다. 최씨 집안의 노비와 이웃들로 이루어진, 사회적인 낙오자들의 좌절감 끝에 나온 극단적인 저항이었다.

이를 본 최국선옹은 합법적인 수단을 쓴 재산 증식이라고 해서 사회적 측면에서까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가지 기준을 세우게 되는데, 바로 ‘흉년기에 땅을 사지 말라.’라는 가훈이었다. 가진 자로서 없는 자의 궁핍을 이용하여 치부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도적떼와의 원한관계를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꾸고, 그들에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헤아려 자신의 철학을 바꾼 유연하고 겸손한 처세이다.

그리하여 농민들이 급박한 사정으로 식량을 꾸어가며 최 옹에게 담보 잡힌 문서들이 책상 가득하였으나 옹이 문서를 소각하여 더는 묻지 않음으로써 담보 잡힌 사람들이 불안해하지 않게 배려해 주었다. 갚을 사람이면 문서 없이도 갚을 것이라는 신뢰로 사람들을 대하였다는 뜻도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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