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이야기(칼럼)

자체 발광(發光) 2

풍수명인 2010. 8. 11. 21:46

당시 지주를 대리하여 소작인들을 관리하고 수확량에 따른 소작료를 책정하는 ‘마름’은 그 횡포가 심하여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최씨 가문은 이런 마름 제도를 두지 않고, 직접 소작농과 대화하여 그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지료를 책정하였으며, “만 석 이상 하지 말라‘는 가훈에 따라 그 이상의 산출이 있을 때는 그만큼 지료를 깎아주어 없는 자에게 환원시킴으로써 적정한 부를 추구하였다.

경작지가 넉넉하지 않은 그 일대에서 적정 수준을 넘는 소작료의 징수는 누군가의 원성을 사고 자칫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지료 수입을 만 석으로 고정하니, 최 부자 집의 농토가 늘수록 소작인들의 소작료는 감소하였으니, 결국 재산이 불어날수록 소작인들도 덩달아 잘사는 ‘상생의 경제’를 구현하였다.

이런 연유로 최 부자의 땅이 더 많아지기를 소작농들은 원했으며, 판다는 땅이 있으면 제일 먼저 그 집에 알렸다 한다. 이런 경영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 더욱더 바람직하게 발전할 수 있는 매력적인 재산운영방법으로, 적정이윤 추구로 동기를 유발하니 이윤극대화 이론에 의한 경영성과를 훨씬 능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덧붙여, 전쟁 후에 버려진 경주 내남면 이조리의 습지를 개간하여 경작지로 바꾸는 등 이들의 땅이 멀리 울산까지 이어졌다. 당시의 농법으로 볍씨를 논에 직접 뿌리는 직파법 대신 이앙(모내기)법을 도입하였으니 여기에는 물이 필수인바, 인공수리시설을 이용한 농업용수 확보에 진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농사 노동력을 크게 줄이고, 겨울과 모판에서 모가 자라는 봄 동안 보리재배를 하는 이모작을 가능케 하여 괄목할 만한 생산력 증대를 가져왔으니, 이는 또한 더 큰 부의 축적으로 이어졌다. 이 농법은 또한 조선 후기 농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노비들에게도 농사를 짓게 하여 땀 흘린 노력의 결실을 성과급제도에 의하여 나누어 갖도록 하여 시대에 앞선 경영기법을 적용하기도 하였다.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 동안 비단옷을 입지 말라 하는 가훈이 있어, 무명옷을 기워 입는 절약정신을 시댁생활 초기부터 몸에 베게하고 고단한 삶을 경험하게 하는 등 수백 년의 부를 이어 온 가문다운 근검 철학을 가지고 있다. 또한, 손님을 접대하는 하인이나 소작인들에게는 소작료를 면제해주는 특권을 주었을 정도로 손님이나 과객(過客)의 극진한 접대를 강조하였다고 한다. 한 예로서, 한 해 3천 석의 수확량 중 1천 석은 과객을 위해 쓰고 1천 석은 주위 어려운 사람을 위해 썻다 한다.
















                          - 최부자집의 육연과 육훈 - 


손님을 정성으로 대접함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을 얻고 다른 지역에 대한 많은 정보와 문화체험 및 교류를 통해 유익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자신들의 사업상 지표로 삼고 삶의 질을 높이고 다양화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파격적인 베풂은 차차 사회적인 덕망을 받고 나아가 튼튼한 기초위에 가문의 부를 올려놓으려는 일종의 슬기로움이었다고 본다.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는 옛날부터 ‘활인당’이라고 불리던 곳이 있다.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라는 최 부자 집의 또 하나의 가훈이 있다. 최씨 가문의 부를 크게 일으킨 최국선 옹 때의 일로 극심한 흉년으로 굶어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던 시기에 자신의 곳간을 과감하게 개방하고 죽을 쑤어 죽어가는 이들의 생명을 살린 장소가 되었다.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 사례이다.

마지막으로, 최 부자 집의 육훈(六訓)중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라는 가훈이 있다. 그때의 시대적 배경은 극심한 당파싸움으로 세도가들의 명암이 수시로 바뀌는 시기였으니 중앙의 고위직에 나아가면 필연코 당쟁에 휘말려 가문을 유지하지 못할 것을 예견하였는바, 원래 무반(武班; 무관의 반열)이었던 경주 최 부자 집을 실제로 400년 동안 당쟁으로부터 지키게 한 가르침이 되었다.

한편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최 부자 가문의 12대 최준 옹이 조선국권회복단 및 조선광복회의 조직원으로서 철통 같은 감시망을 뚫고 독립운동자금을 대고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탄원에 동참하는 활동을 하던 중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또한, 최준 옹의 둘째 동생 최완은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35세에 순국하였다.

‘백산상회’를 통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으나 그 회사의 부도는 예정되어 있었으니 결과적으로 최준 옹은 3만 석에 해당하는 빚을 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모든 재산이 압류되었는데 당시 식산은행 아리가(有賀光豊) 총재가 그와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빚의 절반을 탕감하여 주었다는 기록을 보면, 그의 인품 또한 비범하였음을 미루어 짐작해 본다. 

일제강점으로 겪은 쓰라린 경험을 거울삼아 최준 옹은 해방된 조국을 부강하게 할 인재육성에 뜻을 두게 된다. 그리하여 선산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내놓아 대구대학교(영남대학교의 전신)를 설립하고 운영하였으나 당시의 강화된 법과 정책 변화로 운영난에 봉착하니 대학은 주인이 바뀌는 운명을 겪게 된다. 마치 모든 것을 걸고 산화하듯이 밝게 빛난 후 역사 속에 빛나는 가문을 남겨 두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도덕적인 부(富)의 축적과 부의 환원을 통한 상생을 하여 스스로 발광체가 된 경주 최 부자 집을 비교하여, 흔히들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에 버금가는 명가(名家)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평가가 썩 명쾌한 표현이라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두 집안이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비슷함도 있지만, 부의 축적과정과 그 재산을 지켜내는 철학 그리고 사회에 환원하는 방법이 차이가 있다.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 

메디치 가는 14세기 초부터 17세기에 걸쳐 번성하였는데, 처음에는 피렌체 지방에서 환전상을 주업으로 하는 평범한 평민 가문이었으나, 후에는 직물교역과 은행업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 갔다. 가문의 수장인 ‘코지모 메디치’ 대에 부가 극에 달하였는데 그를 ‘무관의 피렌체 왕’이라 칭하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메디치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못하면 전쟁을 치를 수 없다고 할 만큼 엄청난 재력을 지녔던 가문이다.

이들은 막대한 부를 투입하여 피렌체 빈민구제단체를 세우고 후원하였으며, 순례자 중 병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을 건립하고, 각종 행사에 거액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당시 학문과 예술 발전을 위하여 아낌없는 후원을 하여 문예와 산업진흥에 밑거름 역할을 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미켈란젤로는 코지모의 손자인 ‘로렌초’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예술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메디치 가는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여러 예술가에 대한 후원을 통하여 르네상스 문화운동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함으로써 세계사적인 업적을 쌓게 된다. 

코지모는 가문 300년의 기틀을 닦았는데 죽어서 ‘조국의 아버지(國父)’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들은 막강한 부에 그치지 않고 프랑스와 영국의 왕가 등 유럽의 여러 군주와 혼인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또한, 코지모 메디치 1세는 토스카나 공화국의 대공으로서 통치자로 군림하였으며, 당시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그리고 레오 11세로 이어지는 세 명의 교황을 배출할 정도로 막강한 정치기반을 겸비하고 있었다. 


                         코지모 데 메디치의 동상(피렌체) 


후에 코지모 1세는 자신의 별장에 피렌체 대학을 세워 후학 양성에 힘쓰게 되는데, 한마디로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썼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가문이라 하겠다. 그러나 결국에는 메디치 가문을 수호하고 빛내주었던 정치권력을 반대하는 정적들 손에 300년 자체 발광의 역사를 마치게 된다. 
 

시대적 토양이 달랐던 동서양의 가치기준으로 보면, 메디치 가문을 표현하는 함축적인 말은 영리함, 귀족적, 계산적, 실리적, 베풂 그리고 이성적이라는 단어이다. 그리고 경주 최씨 가문은 우직함, 서민적, 덕망, 정의로움, 의리 및 겸양이라는 수식어이다. 메디치 가의 사회적 역할 수행은 학문과 예술발전에 대한 후원과 기부 및 구제의 방식이지만, 경주 최씨 가문은 빈민층에 대한 구호과 공생정신이라는 차이가 있다.  

메디치 사람들이 가난한 자에 대한 시각을 수직적 상하관계로 설정하고 정치권력까지 갖추었던 것과는 반대로, 경주 최씨 사람들은 사회적 빈곤층을 동등한 수평적 관계로 보고 겸양을 갖추고 함께 살려 하였다는 뉘앙스가 존재한다. 부의 축적과정에서도 그들은 타인을 배려함과 공생하고자 함을 염두에 두었으니, 효율과 실리를 앞세운 메디치 가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메디치 가문의 업적이 찬란하게 빛나는 결과를 낳았지만, 완전한 자체 발광을 하지 못하고 이면의 암흑에 숨어 있던 적들에게 살해당한 후 망하게 된다. 진정한 자체 발광이란 뒷면의 어둠, 즉 반대 세력 내지는 적이 없는 상태를 말함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사를 좌지우지하는 또 다른 근본적 조건이 있을 수 있겠다 하는 예감을 떨쳐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느끼지 못하고 예측이 어려운 그 조건이란 바로 풍수적인 변화이다. 산과 강이 불변하니 변할 것 같지 않지만, 흐르는 기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니 그것과 관련한 인간사는 주종관계처럼 절대적이고 밀접하게 변화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최 부자 집의 풍수 

양택이나 사업장 터 잡기의 풍수지리 이론은 주위보다 높지 않고 물이 고여 있지 않을 정도의 낮은 장소를 권하기도 하는데, 낮은 집터로 흘러 온 물은 재물을 뜻함으로 재산 축적에 유리하고 바람을 피하게 되어 생기의 저장에 유리한 이유 때문이다. 또한, 낮은 지붕은 겸허함을 나타내고 편안함을 주니 타인이 호감을 느끼며 출입하도록 하는 장점이 있다.
 
 

이들은 처음에는 경주시 내남면 게무덤이라는 곳에서 파시조(派始祖)인 최진립(崔震立) 옹 때로부터 약 200년 동안 살다가 교동의 현위치로 신축하여 이전하였는데 이곳에서 줄곧 만석꾼을 유지하며 살았다. 원래는 신라의 요석공주가 살던 궁터였는데, 집을 지을 당시 인근에 향교가 있다는 이유로 유림의 거센 저항에 봉착하자 터를 한자 이상 깎아내려 지음으로써 그들의 반대를 피해 가기도 하였다 한다.  

아마도 좋은 집터에 대한 집착이 터를 낮추어 집을 짓게 되니, 오히려 지리적으로 재물이 모여드는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낮은 곳에 사는 만큼 그들도 자연스럽게 겸손함을 몸에 익혔으리라 본다. 집 앞 개울 건너에 있는 안산 또한 유순하게 두 팔을 벌려 집을 향해 예를 갖추고 정을 주는 길사(吉砂)이다. 
 

풍수지리에서는 집이나 묘를 통한 발복의 기간을 추정하는 한 방법으로, 그 일대를 관장하는 산(小祖山 또는 主山)에서 집이나 묘의 뒷산까지의 봉우리 수를 세어 그 사이를 1대(대략 25~30년)로 하여 그 지속기간을 측정한다. 그리하여 ‘이 자리는 00년 동안 발복할 자리이다.’라고 해당 장소의 지리를 평하기도 한다.

뒷면의 어둠과 추함을 감추려고 앞면의 모습을 더더욱 치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역사속 에서 名家들의 자체 발광기간이 짧고 그 예가 희소한 점이 아쉽다. 요즈음 각자의 분야에서 각고의 노력을 통하여 세계적으로 우뚝 솟아있는 發光人이 많아졌다.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스스로 빛을 내며 오래도록 주위를 밝게 조명하는 세상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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