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하계 휴강기간 중 KBS 풍수 반원들과 함께 춘천시 우두동에 있는 소슬묘를 처음으로 답산하였다.
춘천의 본래 지명은 ‘소머리’라는 기록이 있다. 소머리 고장을 한자로는 우곡성(牛谷城)인데 이 명칭이 백제 초기부터 사용되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다. 우두산(해발 133m)은 소의 머리 형국이라 하고 하늘에서 내려온 천우(天牛)가 강을 건너는 모양새로 황우도강형(黃牛渡江形)의 천하 명당이 있다고 전해온다. 이런 연유로 춘천의 상징동물을 天牛(하늘소)라고도 한다.
춘천의 북쪽에서는 죽엽산 오봉산 용화산을 거친 산줄기가 우두 평야에서 멈추었고, 북에서는 율문천이 흘러 동북에서 흘러오는 소양강과 합류한 후 우두산을 감싸고돌아 다시 북한강과 합류하는 수세이다.
황우도강형인 우두산의 정상부에는 ‘소슬묘’가 있다. 흔히 소가 편안하게 누워있는 와우형(臥牛形)에서는 젖 부위에 기운이 집중되나, 강을 건너는 소의 형국에서는 호흡이 중요하니 코 부위가 혈처가 되고 소슬묘가 그 상응하는 곳에 자리하였다.
소슬묘의 地氣로 판단하자면 직경 수십 여 m는 됨직한 혈권과 생기가 각각 중복해서 묘를 에워싸고 있는 실로 대단한 명당이다.
이러한 명당은 특히 기운이 강하니, 그동안 파묘나 위해를 가하려는 행위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왔으리라 추론해본다. 그동안 가뭄이 심하게 들거나 장마가 지나치게 오래 계속되면 이곳에 몰래 투장한 것으로 믿고 관민이 총동원하여 투장한 묘를 파내었다는 기록이 『춘천의 지명유래』에 있으며, 지금도 실혈을 한 투장묘가 10 여기 있다고 구전될 정도이다.
『강원도 도세 요람의 춘천 풍토기』에는 “분묘 발굴 조사를 했는데 묘는 산 정상에 위치하고 높이는 150cm로 만두 모양인데 지층은 표토 60cm, 중토 90cm, 치토(置土) 아래는 자연층이다. 그런데 중토와 자연 지층 중간에 300년 전의 기와 편 3개를 발견한 외에는 시신은 물론 다른 어떤 물건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라는 기록과 함께 결론으로 위치가 산 정상에 있으니 묘가 아니고 제단이나 기타 유사한 용도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한편, 소슬묘를 무자손천년향화지지(無子孫千年香火之地)라고 하여 비록 자손이 없지만 천년 동안 향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대명당으로, 소가 아무리 밟아도 다음날이면 솟아난다고 하여 근래에 사람들이 이를 시험해 보고자 소를 매었더니 소가 봉분을 뿔로서 파헤쳐 놓았는데 다음 날 묘를 보았더니 아무런 흔적이 없어 신비로운 『솟을 뫼』라고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春州誌). 또한 병들거나 아들이 없는 이가 기도를 하면 병이 낫고 아들을 낳는다는 소문 때문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향을 피우고 소원을 빈다고 한다.
모든 방위에서 기라성 같은 砂들이 우두산에 서기를 집중시키고 있다. 혈성은 토성체로 오성귀원격(五星歸垣格) 내지는 오성취강격(五星聚講格)에 해당하는 극귀의 대명당이다.
북쪽 坎方에서 수성체인 수리봉(水利峰)이 장막을 두르고, 坤方과 離方에 삼악산과 연엽산의 화성체가 불꽃처럼 솟고, 동쪽 辰方 목성체인 마적산(馬蹟山)이 우뚝 서고, 서쪽 兌方 금성체인 북배산(北培山)이 각각 오행 방위에 맞게 자리하고 있다. 모두가 비등한 세력으로 단정하고 아름다운 중에 진혈을 이루고 있다. 특히 내룡이 壬亥脈이니 천자(天子)의 침궁(寢宮)인 자미원국(紫微垣局)에 해당한다. 원국(垣局)이라 함은 양택지(陽宅地)는 제왕지기(帝王之基) 요, 음택지(陰宅地)는 제왕(帝王)이 탄생(誕生)한다는 곳이다.
소슬묘에 관한 전설로 명나라를 건국한 명 태조(재위 1368~1398년)인 주원장 조부 묘라는 설, 청나라 황제 조부의 무덤설. 말갈족의 무덤이라는 설. 일본 건국과 관련한 왕자 숙솔의 무덤이라는 설 등 여러 설이 전해진다.
그중 역사적인 정서와 감정에 기인하여 일본 왕자 숙술의 무덤 설은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펼친 내선일체(內鮮一體) 슬로건에 따른 민족말살음모라는 주장으로 다른 설보다 소외되어있다.
그러나 그동안 수차례 답산을 하면서 묘의 존재에게 질문을 해보고 있다. 그리고 의외의 답변에 못 미더워 매번 갈 때마다 재차 삼차 질문하고 있다.
언제부터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가?
그대의 나라는?
후손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그대는 혼자인가? 아니면 몇 인가? 성별은?
아마도 신계의 어느 경지에 있는 듯 그 존재는 품위 있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답변을 하곤 한다.
또 오시었소.
나는 기원전부터 이곳에 있으며,
본디 나는 이곳 태생이요,
나의 후손들은 일본에 있는 사람들이고,
이곳은 남녀 둘의 음택이요.
때마다 일본 관련설을 내선일체 슬로건에 따른 루머로 치부해왔으나... 혼란스러움을 떨치지 못하곤 한다. 묘의 기원이 ‘기원전부터’라는 응답에 더더욱 황당하지만, 그 답변이 다 맞다는 주장을 하고 싶지는 않다. 어쩌면 그 존재는 나라와 민족 따위는 초월하여 어떤 경지에 도달한 듯한 느낌이다.
필자의 풍수지리 처음 강의 내용이 “만물은 생명체”이다. “그것을 모르면 풍수를 배우는 내내 난해한 과정이다. 육안으로는 물질과 물체만을 인식할 수 있지만, 물체가 없는 기로만 된 존재도 엄연한 생명체(氣生命體)이고 物로 이루어진 존재보다 훨씬 더 많고 다양하게 우리와 영향을 주고받는다.”라는 내용이다.
전술한 ‘분묘 발굴 조사’에서는 시신은 물론 유사한 물체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기록이 있듯이 소슬묘의 존재는 오랜 세월로 인해 物을 상실한 ‘氣생명체’인 것이다.
物 + 氣 + 理 = 可視 생명체,
氣 + 理 = 不可視 氣생명체(物을 상실)
흔히 대사작용이나 움직임과 변화가 없는 것들은 무생명체로 보지만, 집, 손목시계, 신발, 스피커, 책상 등과 같은 것들 모두 생명체이다. 이 이치를 알아야 사물이나 자연과의 기 교감이 가능하다.
보이는 것과 볼수 없는 것 모두 끊임없이 속삭여오지만 우리가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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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내용은 2020년 4월 27일 추가 기록하였다.
위에 기록한 소슬묘의 존재가 답한 내용으로 그 존재의 ‘후손이 일본에 있다’는 답변에 대한 자료들이다.
문화인류학 책인 '총·균·쇠' 의 저자인 미국의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와 일본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학자들의 일본인의 뿌리에 대한 연구 발표 내용이다.
일본 역사의 가장 큰 변화 시기는 기원전 400년 경이다.
BC400년 전 부족 국가인 진국(辰國, 전라도 백제)에서 이주민이 수렵 채집 사회였던 규슈지역에 진출하며 철기문화와 농업이 전파되고 이후 일본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한국인이 일본인의 조상이라는 과학적 증거와 무덤 항아리 거울 등 고고학적 자료도 많고
유전학적 근거로도 한국인과 일본인은 가장 가깝다. 규슈에 정착한 한국인들이 점차 많은 자손을 퍼트리고 북쪽으로 진출하였다는 일본 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계속 나오고 있다.
일본 돗토리 대학 다카오 교수팀의 연구 결과로 “일본인은 한반도인의 후예”이고 “일본인의 뿌리는 한반도계 혼혈”임을 DNA 분석으로 입증하였다. 즉 한반도 이주민과 원주 아이누인이 결합하여 일부 혼혈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백제가 망한 이후 백제의 많은 유민들이 일본으로 흡수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이때의 일본은 백제를 상국(上國)으로 여겼으니 백제의 유민들은 통일신라 체제에서 살지 않고 일본으로 들어갔다는 주장이다.
춘천 우두산 소슬묘에서 유래된 일본 천황家(소시모리)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이다.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의 건국사화에서 BCE 660년에 즉위한 초대 왕 진무神武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일본 고대사는 고조선이 개창한 역사임을 알 수 있다. 천손강림天孫降臨 신화神話인 환웅의 배달 건국사화가 일본 건국사화와 그 형식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서는 일본의 국조신 아마테라스의 아우인 ‘스사노오’가 과도한 야심을 품고 난동을 피워 추방당한 후 ‘자신의 본국本國인 신라국에 내려와 ‘소시모리’라는 곳에 살았다’라는 기록이다. 즉 아마테라스와 그의 동생 스사노오는 한반도 출신임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일본 고대사는 한반도 이주민 개척사이다.
‘소시모리’라는 곳은 한국어로 우두산 ‘소슬묘’라고 한다. 실제로 일제 강점시기에 일본 총리 고이쇼는 소슬묘를 신성하게 여겨 신궁(神宮)까지 세우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춘천 우두산 정상의 소슬묘는 원래 ‘소시모리 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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