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英陵)이 있다. 조선 제4대 왕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1395∼1446)를 합장한 무덤으로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었다.
영릉은 조선 왕릉 중 최초로 한 봉분에 왕과 왕비를 합장한 형태인데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는 능으로, 왕실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 기본예식인 국조오례의에서 정한 바를 따랐다.
원래 영릉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었으나, 왕실에 흉사가 계속되자 조선 제 8대 왕인 예종(睿宗) 때에 왕릉을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이 왕릉은 우리나라 제일의 음택으로 손꼽히는 자리로 조선왕조가 100년은 더 연장됐다고 평가받는 명당이며 이런 이유로 풍수지리인들이 많이 찾는 답사 장소이다.
영릉
영릉의 조성 경위
생시에 풍수지리의 이치를 잘못 이해한 대표적인 왕이 세종대왕이다. 1446년(세종 28년) 현재의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릉(獻陵 : 태종 능) 서쪽에 쌍실의 수릉(壽陵)을 조성하였다. 수릉이란 임금이 죽기 전에 미리 만들어 놓은 가묘(假墓)를 말한다. 참고로 민간에서는 생시에 미리 잡아놓은 묏자리를 신후지지(身後之地), 수실(壽室) 또는 수당(壽堂)이라 한다.
수릉을 정한지 1년 후 소헌왕후(1395∼1446)가 승하하여 땅을 파보니 물이 나왔다. 신하들이 능 자리가 좋지 않아 다른 장소를 권하였으나, 세종은 “부왕(父王)의 능에서 가까운 곳보다 좋은 장소가 어디에 있겠느냐”하며 왕비를 애초 계획대로 안장하였다. 그리고 4년 후 1450년 세종이 54세로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그 후로부터 왕실의 흉사가 다음과 같이 계속되었다.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文宗, 1414~1452)이 즉위하였으나 재위 2년 3개월 만에
병사하였고, 뒤를 이어 문종의 아들인 단종(1441~1457)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 역시 3년 만에 왕위를 강요 때문에 수양대군에게 물려주고
비명에 죽게 된다.
세종의 제2 왕자인 수양대군(1417~1468)도 재위 기간 동안 여러 괄목할 치적을
남겼으나 평생 심한 피부병으로 시달리다가 13년 만에 승하하였고,
세조의 차남인 예종(睿宗)이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재위 13개월 만에 19세로
사망한다.
또한, 세조의 장자 의경 세자(1471년 성종 2년 德宗으로 추존되었음)가 19세에
갑작스럽게 가위눌림으로 급사하였고,
예종의 왕비 장순왕후(章順王后)마저 첫 원자(元子: 세자로 책봉하기 전 임금의
장남)를 낳고 사망했으며, 곧이어 원자마저 사망하였다.
이 밖에도 세종의 셋째인 안평대군과 여섯째인 금성대군이 각각 자신들의 형인
세조(수양대군)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왕실의 수난이 계속되었다.
결국, 세종 이후 19년 동안 4명의 왕이, 길게는 소헌왕후 이후 예종의 원자까지 23년 동안 왕과 왕비 및 왕손을 합한 9명이 사망하였다. 예종이 즉위하자 신하들 사이에서 더는 이대로 둘 수 없다는 여론이 돌기 시작했으니, 당시의 세종대왕릉이 흉지인 연유로 왕실의 흉사가 끊이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으며 신하들의 상소에 못 이겨 예종은 이장을 결심하게 된다.
후에 이장하기 위해 개장(改葬: 이장과 같은 말로 다시 장사 지냄)을 한바, 광중이 냉하여 18년 된
시신이 썩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풍수지리는 불가시의 영역을 상당 부분 포함하므로 논리적이거나 객관적인 이치를 도출하지는
못한다. 보이지 않는 기(氣)를 대상으로 길흉화복을 예단하기 때문에 현재의 과학 수준으로는 비과학적이라는 평을 들을 수밖에 없다. 아니 현재의 학문 수준으로는 풍수지리를 과학화하지 못한다는
말이 더 타당하다. 그러나 그 예단은 무서울 정도로 맞아떨어지니 어찌 이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조정이 이장을 결심한 후, 전국에서 능력이 뛰어난 지사(지관)를 선발하여 명당을 찾도록 하였는데,
지사로 선발된 지관들이 세종대왕 능자리를 찾기 위해 한양에서 백 리 안에 있는 땅을 모조리 찾아보았으나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왕릉이 원칙적으로 한양 도성에서 1백 리를 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후대 임금의 성묘 행차 시에
능이 하루 안에 왕복할 수 있는 거리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 선발한 지사 중 안효례(安孝禮)라는 지관과 그 일행은 여주는 한양에서 100리가 넘지만,
남한강 뱃길을 이용하면 하루 안에 왕복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여흥(여주)로 갔는데 이들이 찾아낸 곳이 현재의 영릉 자리이다.
안효례 일행이 북성산 정상에서 염두에 두었던 터가 있었으나, 막상 하산한 후에는 찾지 못하였는데 현 영릉 부근을 지나던 중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며 억수 같은 소낙비를 만났다. 그곳은 인가 한 채 없는 논밭과 들판뿐인 인적이 드문 야산 지대였다. 일행은 황급히 비를 피할 곳을 두리번거리며 찾던 중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집의 윤곽을 발견하고 거기로 뛰어가 보니 폭우에 개울물이 깊이 흘러 건널
수가 없었다.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가려 하는데 멀리 돌다리를 발견하고 황급히 다리를 건너가 제실(祭室)에서 비를 피하게 되었다. 이윽고 소낙비가 그치자 제실 밖으로 나와서 주위를 둘러보니 제실 위쪽에 있는 묘에서 이제까지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상서로운 기운과 지세를 우연히 발견하고 가까이
가서 보니, 보면 볼수록 천하의 대명당이었다.
일행은 더는 간산을 중지하고 한양으로 돌아와 임금에게 여주땅에 천하대명당(天下大明堂)이 있다고 아뢰었다. 예종은 몇몇 대신들을 다시 여주에 보내 자리를 답사하게 하였고, 그 뒤 고위 대신들과 육조 참판 및 승지들을 불러놓고 안효례(安孝禮)에게 재차 확인한 후, 선대 세종대왕릉의 이장처로 결정하게 되었다.
참고로 당시에는 왕릉이 들어서면 그로부터 십 리 이내에 있는 묘는 모두 다른 곳으로 이장해야 하므로 이때에도 수많은 민가의 묘들이 멀리 왕릉을 피해 이장됐다고 전한다.
이인손의 묘택
애당초 영릉 자리는 광주 이씨로 세조 때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묘였다고 전한다. 이인손의 자(字)-성인이 된 남자에게 붙이는 이름. 윗사람이 본인의 기호나 덕을 고려하여 붙여줌-는 중윤(仲胤)이요 호-본명이나 자(字)
외에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으로 본 이름을 부르는 것을 피하는 풍속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는 풍애(楓厓)이며 시호(諡號)-왕이나 사대부들이 죽은 뒤 망인의 공덕을 찬양하여 추증한 호-는 충희(忠僖)이다. 세상을 떠나기 전,
풍애 선생은 유능한 지관이 일러준 대로 자신의 수당(壽堂)을 현재의 영릉 자리에 잡은 후, 첫째, 묘
앞의 명당을 흐르는 개울에 절대로 다리를 놓지 말 것이며, 둘째, 재실이나 사당 등 일체의 건물을
짓지 말라는 묘택 관리의 금기 사항을 자식들에게 알려주었다. 처음에는 풍애 선생의 유언대로 금기 사항이 그대로 지켜졌다.
그 후로 큰아들 극배는 영의정, 둘째 극감은 형조판서, 셋째 극중은 정이품 좌참찬, 넷째 극돈은 종일품 좌찬성, 다섯째 극균은 좌의정에 올랐으며, 후대 자손들도 정승판서를 비롯해 고관대작이 연이어 배출됐다. 아들 5형제와 종형제 3명을 합하여 광주이씨 극(克)자 항렬 8명이 영의정에서부터 판서 참판 벼슬을 하며 조정의 어전회의에 참석하고 있었음을 '팔극조정(八克朝廷)'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후손들은 이처럼 가문이 번창하자 모두 선조의 음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손이 발복하면 할수록, 제실도 없이 초라하게 묘지를 놔두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의견이 중론이었다. 다리가 없는 명당 앞의 개울은 신발을 벗고 바지가랑이를 걷어 올리며 건너야 했고, 재실이 없으니 멀리서 온 후손이 잠잘 곳이 없어 불편해하는 등 양반의 품위를 차리려는 후손의 입장에서는 풍애 선생의 음택을 치성하고
묘제를 지내야 함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위세 당당한 집안에 풍애 선생 음택에 관련한 이러한 문제가 생기자 후손들은 풍애 선생의 유언을 지켜야 함을 무시하고 문중 회의를 거쳐 재실을 큼직하게 짓고 튼튼한 돌다리를 놓았다.
후일 결과적으로는 비를 피할 재실과 개울의 다리 덕분에 안효례와 일행이 풍애 선생의 묘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급기야 왕실에 그 자리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의 세종대왕릉 자리는 평범한 지관이 얼른 보기에도 나지막한 산언덕에 있는 묘택으로 천하의 대명당이었으니, 그 후로도 이곳에 왕릉을 조성할 수 있기까지 많은 곡절이 있다.
북성산을 내려온 안효례는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다. 비를 피할 곳을 찾는데 산자락 아래 조그마한 건물이 보였다. 광주 이씨 문중에서 일 년 전에 세운 재실이었다. 그는 그곳을 향해 달렸는데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나타났다. 갑자기 쏟아진 소낙비 때문에 냇물이 불어 섣불리 건널 수 없었던 것이다. 낙담해 두리번거리던 그는 아래쪽에서 돌다리를 발견하고 냇물을
건너 재실에서 소낙비를 피했다.
소낙비가 그치자 주위를 돌아본 안효례는 자신이 북성산 정상에서 보아 두었던 그 터였는데 하산해서는 찾을 수 없었던 대 길지가 눈 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그곳이 바로 자신이 찾아다니던 천하의 명당이었는데, 묘비를 보니 묘택의 주인이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이었다.
안효례는 이 자리가 천하의 대명당(大明堂)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나, 왕릉이 아닌 정승을 지낸 분의 묘택으로서 일반 반가 사람의 신후지로는 격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이런 명당 터는
이 나라에서 두 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니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천장지로서는 더 없이 좋은 곳이지만, 풍애 선생의 묘택이 있음을 고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윽고 궁궐로 돌아와 예종(睿宗)께 아뢰자 왕은 대신들과 지관들을 불러다 놓고 논의하였다. 안효례가 말하기를 "여흥 지방을 두루 살펴본 결과 몇 군데 자리가 될 만한 터는 있었으나 천하 대명당 자리로 손꼽을 만한 곳은 딱 한자리가 있사옵나이다. 여흥(驪興)지방 북쪽에 주위 산이 둥글게 감싼 골짜기가 있는데 주산(主山)과 주위 산의 형세가 음택 자리를 조밀하게 둘러친 곳으로, 산이 행룡을 멈추고 물이 환포한 곳은 자손이 번창함이 크고 그 발복이 오래오래 지속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선왕의 능을 모실 곳이 이보다 나은 자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옵니다.“라고 보고하니, 조정에서도 숙고 끝에 안효례의 복명 내용에 따르기로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지존의 왕이라 할지라도 사대부의 묘택을 마음대로 파묘할 수는 없었으니, 예종은
오랜 고심을 한 후에 당시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풍애 선생의 장자 이극배(李克培)를 불러들여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즉 그 일대를 선왕의 천장을 위해 터를 양보해달라는 뜻으로 애원하다시피 수차례
호소를 반복하였다. 이에 이르자 이극배는 어쩔 수 없이 풍애 선생의 묘택을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영릉을 조성하기 위해 땅을 파보니 ‘당장동방성인(當葬東方聖人)’이라는 글귀가 적힌 표석이 나왔는데 직역하면 ‘당연히 동방의 성인이 묻힐 자리’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표석은 권력의 힘으로 남의 묘를 강제로 빼앗은 행위의 당위성을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또 다른 표석에는 왜 나의 유언과 지관 말을 안 들었냐며 탄식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 한가지, 풍애 선생의 묘를 파서 유해를 들어내니 그 밑에서 비기(秘記)가 나왔는데, ‘연을 날려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연이 떨어지는 곳에 이장하여라.'라고 쓰여 있었으니 장례를 할 때 이미 이장을 당할 운명을 알았을 것이다. 풍애 선생의 유언이 적혀 있던 비단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한음 이덕형의 사당 안에 지금도 보관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결국, 풍애 선생의 묘택을 점지한 지관은 이미 후손들이 금기 사항을 어길 것을 알고, 그 차선책까지 준비하였을 것이다.
후손들이 자신들의 경솔했음을 후회하며 연을 띄우니 연은 바람에 날리어 약 10리쯤 밖에 떨어졌다. 그곳에 가보니 대명당은 아니지만 길지로써 가문이 번창할 만한 곳이었다. 그리하여 풍애 선생의 묘를 현재의 영릉 자리에서 서남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으로 이장하였으니, 그곳을 이름하여 연이 떨어진 곳이라 해서 연주리(延主里)라고 불렀으며 지금의 지명은 신주리(新池里)이다. 또한, 그 부근의
산 이름이 연하산이다.
그 자리에 풍애 선생을 이장한 후에도 광주 이씨 자손이 번성하여 현재까지 수백년 동안 후손들의 제향(祭享)을 받고있다. 명종때의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선조 때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으로 유명한 이덕형(李德馨), 예조참판 이극기, 이조참판 이중경, 병조판서 이윤우, 판서 이원정, 대사성 이정립 등이 후대에 가문을 빛냈다.
이 외에도 일설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풍애 선생의 묘를 파묘할 때 신라 말의 풍수사인 도선(道詵)의 비기가 나왔는데 '상공삼년 권조지지. 단족대왕 영핍지지(相公三年 權操之地. 短足大王 永乏之地)'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즉, ‘여기는 나라의 재상이 3년 동안 한시적으로 쉴 곳이지만, 단족대왕은 영구히 쉴 자리이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단족대왕은 세종대왕을 말함인데, 생시에
세종대왕은 한쪽 다리가 짧아 걸음을 절룩거렸기에 단족대왕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지관 일행이 억수 같은 소나기를 만날 것과 후손들이 풍애 선생의 유언을 어기고 재실과 돌다리를 만들지 않았다면, 지관 일행이 이곳을 지나쳤을 것이다. 그리하였더라면 광주 이씨 문중은 조선 제일의 대명당을 빼앗기지 않았을 것을 생각하면 풍수지리란 참으로 오묘하고 신비하다.
특정한 때 날씨인 천기와 한정된 곳의 자기를 무대로 여러 사람이 이처럼 한 치 오차 없이 맞물리고 맞아 떨어져서 자연을 바꾸고 사람 관계를 변화시킨다. '탈신공개천명(奪神公改天命)'이라 하였으니, 하늘이 정한 운명까지도 의도대로 바꾸는 초월적인 힘이 있는 것이다.
영릉의 풍수지리
조선의 역사 500여 년 중 100년을 더 지속시켰다는 영릉은 당연히 우리나라 제일의 대명당이라고 손꼽히는 곳이다. 과연 풍수적으로 어떠한 점이 얼마만큼 좋은 지리적인 조건을 갖추었는지를 풍수의 4과(四科)인 용(龍), 혈(穴), 사(砂), 수(水)의 관점에서 살피기로 한다.
A-북성산, B-영릉, C-녕릉, D-풍애 묘, E-과협처, 녹색선-수세
회룡고주혈(回龍顧主穴)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위치한 세종대왕릉은 멀리 한남정맥의 앵자지맥에서 갈라진 독조지맥의
마지막 산봉우리인 북성산(262m) 줄기에 있다. 영릉의 남쪽에 있는 북성산은 여주의 진산(鎭山)임과 동시에 영릉의 주산이다. 고종 때 제작한 지도에는 북성산의 위치에 영릉주산회룡고주(英陵主山 回龍顧主)’라고 표기하였다. 한남정맥에 속한 북성산을 주산으로 출발한 맥은 과협처인 42번 국도를 지나
북쪽의 지맥(지각)을 만나며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부모산(현무봉)을 기봉하였다. 이어서 부모산을 떠난 맥이 고개를 들어 자신이 출발한 북성산을 바라보니 영릉이라는 회룡고주 대혈지를 맺었다.
이를 회룡고조혈 (回龍顧祖穴)이라고도 하나, 엄격히 말하면 이 자리를 풍수 용어로 회룡고주혈 (回龍顧主穴)이라고 함도 타당하다. 왜냐면 능 뒤에서 부모산까지의 맥이 특이하게도 길게 이어졌는데 중간에 이렇다 할 봉이 없으니 처음 출맥한 곳을 부모산으로, 그리고 북성산을 주산으로 보는 고지도의 기록도 바르다 하겠다. 용이 돌아본다는 것은 그만큼 힘이 강하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회룡고조로
흘러온 맥은 왕후장상 지지와 같은 대혈지를 만든다.
참고로, 산맥이 처음 출발한 산은 태조산(太祖山)으로 시조(始祖)라고 하면, 태조산과 소조산의 중간은 종(宗)으로서 중조산(中祖山)이 있으며 중간의 조상(祖上)인데 여러 중조산이 있을 수 있다. 중조산
다음에 주산(主山)이란 소조산(小祖山)을 말하며 조상 중 할아버지에 해당하며 모양이 단정한 산인데, 그 일대의 기운을 관장하기 때문에 풍수에서 중요시한다. 그리고 주산에서 대개 2~3절 후에 부모산이 있다. 또한, 부모산은 산맥의 마지막 산봉우리이다. 용의 머리가 혈산(穴山)으로 들어오는 모습과 같다하여 일명 입수산(入首山)이라고도 한다. 부모산 이전에 흘러온 맥보다는, 부모산에서 결혈처까지를 구분하여 그 길흉을 중요시한다. 즉 조산(祖山)과 같은 먼 할아버지 대 보다는 나를 낳은 부모의 신분과 미추(美醜), 길흉, 정사(正斜) 등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 직접적이라는 뜻이다.
과협처(過峽處)
북성산을 출발한 맥이 능서면 신지리 독골고개에서 현재의 42번 국도를 가로질러 진행하는데, 이처럼 산봉우리와 산봉우리 사이의 가장 낮은 곳을 과협처라고 한다. 이는 혈을 만드는 필수적인 요건이다. 풍수에서 맥을 점검할 때는 이 과협처를 반드시 살핀다. 만약 잘록한 과협처가 없이 펑퍼짐하게 이어지거나 심하게 깊이 절맥된 산맥은 맥이 이어지지 않고 기운을 모을 수 없어 결혈이 어렵다고 판단한다. 마치 역도 선수들이 힘을 모으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맨 것처럼 과협이 잘록하면 기운을 모아 보낼 수 있다.
현대에서는 도로를 닦기 좋은 곳으로 낮은 곳의 고갯길 부근을 택하는데 과협처는 맥이 통과할 때 가장 손상되기 쉬운 취약 지점이므로 곳곳에 맥이 잘린 곳이 많이 생긴다. 도로공사 등으로 웬만큼 잘린 과협처는 장시간이 지나면 자연 회복력으로 다시 맥이 이어짐을 가끔 본다. 따라서 영릉에는 대혈의 기운이 지금도 맺혀있음을 본다. 자연은 스스로 치유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의 도로공사 방식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과협의 형상으로 산봉우리 간격이 짧은 곳에서는 벌의 허리(蜂腰)와 같거나, 산봉우리 사이가 비교적 긴 곳은 학의 다리(鶴膝; 학 다리 중간의 무릎이 둥글게 돌출된 모양)와 같아야 한다. 영릉으로 가는 과협처는 봉요에 해당한다 하겠다. 결국, 과협에 바람이 들이치거나 막대기처럼 곧고 뻣뻣하거나 굵고 길어서는 안되며, 과협 부분에는 바람을 막아줄 주위 산이 있거나 보내주는 송산(送山)과 맞이하는 영산(迎山)이 있어 맥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
기복지현(起伏之玄)
지현(之玄)이란 뱀이 좌우로 꿈틀거리며 나아가는 형상을 글자로 표현하였다. 산맥이 좌로 갔다 우로 갔다 함을 반복하며 나아가니 역시 생기의 흐름이 왕성한 것으로 본다. 지현하지 않고 지팡이처럼 곧은 모습은 사룡(死龍)이라 하여 극히 꺼린다.
영릉 뒤로 부모산부터 능까지의 입수맥을 간산할 수 있었다. 부모산에서 시작한 맥이 좌우로
지현하며 유난히 길게 진행하니 더욱더 많은 생기를 모으는 듯하다.
또한, 기(起)란 산봉우리가 높이 솟은 형상이며, 복(伏)이란 맥이 땅속으로 숨는 듯한 모습이다. 룡하는 형상이 솟았다(起) 숙였다(伏) 하는 것이 마치 용이 일어섰다가 엎드렸다 하는 듯하여 생기가 흐르는 살아있는 맥으로 본다. 한 번씩 기복을 할 때마다 생기가 왕성해진다고 판단한다. 반대로 기복이 없이 곧게 뻗은 맥은 죽은 것으로 생기가 없어 흉하게 본다. 기복(起伏)의 여부는 산맥의 생사 여부를
가름하는 결정적인 기준으로 매우 중요시한다.
산맥의 아주 좋은 상격 모습은 위아래뿐만이 아니라 좌우로도 기복지현(起伏之玄)하는 생동감 넘치는 형상이어야 한다.
영릉 입수맥
작약지격(芍藥枝格)
대개 지현하는 산맥에는 작약지가 발달하는데 영릉의 부모산을 낙맥하여 혈처 뒤의 봉긋한 잉(孕)에 이르기까지는 좌우에 교차하는 지각(枝脚)이 있다. 마치 작약의 줄기에 매달린 잎이 교차로 호생(互生)하며 길게 뻗으니 전체적인 모양은 좌우 균형을 갖춘 형상이다. 또한, 부모산에서 시작한 용호가 장막처럼 좌우에서 바람을 잘 막아 보호하니 작약지의 역할을 넉넉히 보충하고 있다. 작약지격은
오동지격과 함께 귀한 상격 맥으로 본다.
참고로, 지각의 종류에는 이 외에도 오동지격, 오공절격, 양류지격, 무지각격이 있다.
오동지격(梧棟枝格)이란 산맥의 같은 지점 좌우에서 동시에 뻗은 지각이 마치 오동나무의 가지와
같이 대생(對生)하며 길게 이어져 맥을 잘 보호하는 모습을 말한다.
오공절격(蜈蚣節格)이란 지네(蜈蚣)의 다리처럼 같은 지점에서 대생(對生)하지만 맥을 보호하기에는 짧은 형상이다. 이 경우 오공절을 보충하는 산이 좌우에 있어 바람을 잘 막아주면 상격이다.
수양버들이 바람이 부니 한쪽으로 가지가 몰려있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맥의 지각이 한쪽으로만 치우친 형상을 양류지격(楊柳枝格)이라 한다. 좌우가 균형이 맞지 않아 바람을 막지 못하여 좋은 지각이 아니다. 지각이 없는 쪽을 가까이에서 보충해주는 산이 있으면 선택할 수 있으나, 대개는 후손이 고루 발복하지 못하는 결함이 있게 된다.
용과는 달리 뱀은 다리가 없으니, 뱀이 홀로 출현하여 전진하는 모습과 같이 지각이 없는 맥을 무지각격(無枝脚格)이라 한다. 이 경우 병풍사(土形)나 장막사(水形)와 같은 산이 주위를 감싸주어야 하며 출맥한 뱀이 머리를 들어 용호를 만든 후 결혈해야 좋다.
A-입수맥
태식잉육(胎息孕育)
부모산에서 출발한 맥은 장맥입혈(長脈入穴)로 변화가 없이 곧게 진행하면 사맥(死脈)이 되기 쉬운데, 상당한 거리를 좌우로 지현하며 생사출림(生蛇出林)하여 그 세를 모은 후 고개를 들어 결혈하였다.
부모산에서 출맥(낙맥)하여 좁아지는 곳을 태(胎; 조짐, 처음)라고 하는데 생기를 받고는 있으나 외관적으로는 형태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즉 어미의 혈 기운이 모이기는 하나 구체성이나 현실성이 없는 단계이다.
태 다음의 잘록한 곳을 식(息; 생길 식) 또는 속기처(束氣處)라 하는데 영릉에서는 식의 단계가 상당히 긴 형태를 보인다. 식은 새 생명체가 수태되는 것과 같은 단계이다. 잘록한 부분이 잘 보호되고 있는지가 관건인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작약지와 장막사와 같은 좌우 용호가 잘록한 부분을 잘 보호하고 있다.
식 이후 혈 뒤에서 다시 기봉한 정상을 잉(孕; 임신할 잉)이라 한다. 잉은 자궁 속에 있는 생명체가
형체를 갖춘 것에 비유되는 단계이다. 영릉의 봉분 뒤 봉긋하게 솟은 부분인데 현무정(玄武頂)
이라고도 한다.
마지막으로 영릉의 결혈처(結穴處)인 혈장(穴場)이 육(育)의 단계인데, 어미가 출산하여 자식을 기르는 것에 비유한다.
이와같이 부모산으로부터의 태-식-잉-육의 단계를 살펴보았는데, 이는 단지 하나의 표준일 뿐 일부 중간 단계 또는 전부가 생략된 경우도 있다. 또한, 엄격히 정형화된 것도 아니다. 대개는 그 거리가 짧아 과협 또는 결인속기처(結咽束氣處)가 하나만 있으면 이러한 세부 단계가 나타나지 않지만, 영릉의 경우에는 여럿의 과협이 있으니 태-식-잉-육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
혈의 성체(星體)
맥이 결혈지에 이르러 최종 고개를 들어 만든 봉우리가 혈성(穴星)인데, 이곳에 기를 꽉 채운 혈이
있다. 혈성의 형태에 따라 결혈하는 위치가 다르다.
먼저 혈성을 오행으로 분류하면, 삼각형이나 죽순 모양으로 곧으면 목성(木星), 뾰쪽뾰쪽한 불꽃 모양이면 화성(火星), 사각의 방산(方山) 형태이면 토성(土星), 둥글거나 반원형이면 금성(金星), 구불구불 굽은 산이면 수성(水星)이다.
영릉의 혈성은 둥글고 단정하여 금성 정체(正體)이니, 혈을 정 중앙에 맺었다. 만약 금성이 한쪽으로 치우친 모양이면 기울어진 쪽에 결혈한다. 또한, 혈성이 낮은 형태이면 혈은 높은 곳에 있다.
이밖에 목성이 단정한 정체이면 가운데 결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면 기울어진 곳에 혈을 맺는다.
또한, 혈성이 낮으면 대나무의 마디와 같이 도톰한 지점에 혈이 있다. 치우치거나 낮은 경우 혈 뒤가 허하여 낙산(樂山; 혈 뒤에서 보호하고 받쳐주는 산)이 있어야 한다.
산이 불꽃 모양의 화성형이면 첨예한 지형으로 불안정하고 살기를 띠기 때문에 혈을 맺지 못한다.
토성이 단정한 정체이면 중앙에 결혈하고,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기울어진 곳에 혈을 맺으며, 혈성의 중앙이 오목한 요뇌(凹腦)는 그곳의 아래에 혈이 있다. 혈성이 바닥에 누운 평면이면 높은 곳에 결혈한다. 세 경우 모두 혈 뒤가 허하여 낙산(樂山; 혈 뒤에서 보호하고 받쳐주는 산)이 있어야 한다.
수성 혈성에서는 물결처럼 동(動)하는 불안정한 성질로 결혈하지 못하고 금성의 뭉친 마디가 있는 부분에 결혈한다. 마찬가지로 기울어지면 기울어진 곳에, 낮으면 높은 곳에 혈을 맺는데, 낙산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와겸유돌(窩鉗乳突)
혈의 형태는 태양(太陽)인 와형(窩形)과 소양(少陽)인 겸형(鉗形), 소음(少陰)인 유형(乳形)과 태음(太陰)인 돌형(突形)의 4상으로 분류한다. 이 중에서 영릉은 솟아있는 돌형혈인데, 평탄한 가운데 솥이나 엎어놓은 화분처럼 솟아있다. 이 경우 혈이 높은 곳에 있어 골바람을 받기 쉬우니 주위를 높은 산이 둘러싸서 장풍이 되어야 하는데, 영릉의 용호가 잘 감싸주고 있다.
와형혈은 장심혈(掌心穴-손바닥을 편 모양) 또는 개구혈(開口穴-입을 벌린 형태)이라고도 하며
새 둥지처럼 오목한 모양을 하고 있다. 대개 바람을 피하기가 쉬운 형태로 평지보다는 산의 높은
곳에서 결혈한다. 와형 안에 미미한 유형(乳形) 또는 돌형(突形)이 있어 양중음(陽中陰) 즉 음과 양이 조화롭게 이루어지고, 두 팔(내용호)이 혈처를 잘 안아주고 와형이 반듯하고 둥글게 형성되어 있으면
생기 충만한 길격이다. 오행 상으로는 금형에 해당한다.
겸형혈은 사람이 두 다리를 벌린 듯한 형태 또는 삼태기 모양인데 다리에 해당하는 줄기가 바람을 잘 막아내므로 낮은 곳이나 높은 산을 가리지 않고 다른 혈형에 비해 그 수가 많다. 겸형혈에 미미한
유형(乳形)이 있으면 유두(乳頭)에 혈이 있고, 미미한 와형(窩形)이 있으면 와중에 혈이 맺힌다. 또한, 겸형혈은 혈심 바로 위에서 분수(分水)가 잘 되고 좌우 줄기가 곧게 뻗거나 벌어지지 않아야 한다.
혈성이 두 팔을 벌린 중앙에 성숙한 여인의 늘어진 유방과 같은 모습이 유형혈(乳形穴)이다. 이 혈은 평지나 높은 곳 어디에나 있으나 바람이 들이치지 않아야 한다. 좌우 두 줄기에 비하여 너무 크거나 작지 않아야 하고, 너무 길거나 짧지 않아야 한다. 젖 모양이 두 개인 쌍수유(雙垂乳)와 세 개인 삼수유(三垂乳) 등이 있는데 크기가 비슷하고 좌우 줄기가 환포하면 좋다.
평탄한 곳에서 우뚝 솟아 가마솥을 엎어 놓은 모양으로 용주(龍珠)라고도하는 돌형혈 (突形穴)이 있다. 이 혈은 바람을 피하기 어려우니 사방의 산이 둘러처져 장풍이 되어야 한다. 평지의 돌혈은 바람이 퍼져 불어오니 별로 해로움이 없으며, 물길이 감싸거나 혈 앞에서 모이면 좋다. 유혈과 마찬가지로 쌍돌(雙突), 삼돌(三突) 등이 있다.
영릉은 직경이 약 20m에 이르는 광혈로 능과 곡장을 포함한 주변을 감싸고 있다. 또한, 병풍석이 없이 난간석을 설치하였으며 십이지신상에 해당하는 글자로 방위를 표시하였다. 일반적인 왕릉은 내부를 석실로 조성하나, 영릉은 관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지는 회격(灰隔)으로 만들었다. 또한, 합장릉이므로 상석 2좌를 배치하였으며, 이 밖에 문무석이 능 앞에 늘어 서 있다.
영릉의 사(砂)와 수세(水勢)
앞에서 영릉을 바라보면 거대한 용이 승천하려는 듯하다. 즉 거룡앙천형(巨龍仰天形)이다. 따라서
앞에서 말했듯이 영릉의 혈형은 돌형이므로 바람을 잘 막아줄 주변 사(砂)의 역할이 중요한데,
부모산에서 좌측으로 뻗은 청룡과 우측으로 뻗은 백호 능선이 각각 청룡 하수사(下水砂)와 백호
하수사가 되어 영릉을 두 팔로 껴안듯 하여 앞의 수구(水口)를 잘 관쇄하고 있다.
명당 밖에서는 서출동류(西出東流)인 물을 청룡 하수사가 역(逆)으로 맞이하고 있으니 이 또한
길격이다. 특히 청룡과 백호가 서로 다투지 않고 적당한 거리에서 사양하고 겸손해하는 용호손양격 (龍虎遜讓格)이다. 이와는 반대인 용호상투격(龍虎相鬪格)은 삼척 준경묘가 대표적인 예로서 청룡과 백호의 끝이 서로 마주 보고 머리를 쳐들고 다투는 형국으로 형제간에 불화하게 된다.
또한, 본신안산인 용호가 여러 겹 혈 앞을 막아주고 있으며, 주산(조산)인 북성산이 혈을 다정하게 내려다봄과 동시에 자신이 출발한 조산을 우러러보는 모습으로 천하의 대명당이다.
영릉의 주산, 안산(용호), 내명당
또한, 주변 산들과 능 주변의 소나무들은 공손히 영릉을 향해 조아리며 예를 갖추고 있으니, 등 돌리거나 달아나는 산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영릉을 왕이 조정에서 신하들과 회의를 하는 형세인 군신조회형(君臣朝會形)으로 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좋은 자리를 명당이라고 부르는데, 풍수 용어로는 혈 앞에 펼쳐진 평평한 들판을 명당이라고 한다. 좋은 혈은 명당이 평탄해야 하고 주변을 좌청룡 우백호가 감싸고 있어야 한다. 영릉은 평탄명당(平坦明堂)에 해당하는데 명당의 높낮이가 별로 없어 물이 흐르는 것을 느끼지 못할 만큼 평평한 지형으로 재물에도 이로운 것이다. 또한, 혈 앞의 수구를 잘 막아주고 있어야 하는데, 바로 이러한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곳이 영릉이다. 수구는 기의 출입구인데 휑하니 터져있으면 기를 갈무리하지 못하는 흉지가 된다.
전체적으로는 북쪽에서는 남한강이 영릉을 등지고 동남에서 서북으로 흐르고 있으며, 능의 명당수는 평전수(平田水: 논밭처럼 평탄한 땅에 물이 퍼져서 흐름)로서 남쪽으로 흐르기 시작하여 동쪽으로
물길을 틀어 외당수와 합류하고 마지막으로는 서북으로 흘러 남한강에 합류하고 있으니 산수가 서로를 완벽하게 환포하고 있다.
따라서 영릉은 산맥과 물길이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으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좋은 기운이 모이는 곳으로 풍수지리적으로 천하명당이다. 안동의 하회마을 역시 마을 뒤를 감고 있는 내맥과 앞에서 흐르는 물이 서로 산수태극을 이루고 있다.
또한, 규모가 큰 송룡수(送龍水)로서 용의 역량이 대단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룡수란 부모(혈성)산 좌우에서 시작한 물이 좌우로 흐르다가 용맥이 멈춘 곳에서 합수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명당수와 합류한 물이 남한강을 만나면서 반원형의 퇴적사를 쌓았는데, 이를 풍수 용어로는 나성(羅星)이라고 한다. 나성이란 수구를 막아주는 사(砂)의 하나인데 <의룡경>에서는 “이러한 곳에서 혈을 찾고 용을 찾으면 헛되지 않고 또한 용과 혈의 자취를 잃지 않게 된다.”라고 하였다. 나성은 큰 비에 침수될 수 있으므로 흙으로 된 경우보다 바위로 된 경우가 더 길하다. 그러나 자리가 혈이 아닌 경우 나성이 혈장에서 보이면 눈병이나 낙태를 일으키는 흉함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영릉이 혈이지만 나성이 직접 보이지 않는 위치이니 이 또한 길격으로 본다. 결과적으로 나성은 물을 쉽게 흘려보내지 않아 좋은 기가 쌓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간산하며 내내 생각한 바는, 영릉 일대는 가히 우리나라 제일의 명당으로서 치밀한 설계에 의한 인작(人作)으로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천작(天作)으로서의 뛰어난 자연 예술품임을 새삼 부정할 수 없었다.
'풍수이야기(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묘 후의 묘역 조성 (0) | 2017.03.15 |
---|---|
조안산 (0) | 2017.03.15 |
현풍의 순역(順逆)과 정기(精氣) (0) | 2016.11.28 |
거지 허탕골 (0) | 2016.11.21 |
생기(生氣) (0) | 2016.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