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이야기(칼럼)

한천자 묘

풍수명인 2020. 9. 27. 22:39

한여름 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지난 8월의 녹음으로 풍수 간산하기에는 악조건이었지만, 오랫동안 품었던 호기심으로 한천자 묘를 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그곳에 대한 풍수 답사기를 쓰기 전에 살펴야 할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고려시대부터의 천민 성씨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는 혹시 모를 명태조 주원장과의 연관성에 대한 고찰이다.

 

원래 천민은 성씨가 없다. 돈을 많이 모아 성씨를 갖는 경우와 아주 가끔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천민에게는 신분을 높여주고 성을 주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대개는 전쟁이나 민란이 일어나게 되면 가장 먼저 천민들이 관청에 보관한 문서들을 불 질러 없앴기 때문에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대개 천민의 이름은 주인이 부르기 편하고 기억이 잘 되는 이름을 지었는데, 한자 이름이 아닌 한글로 지은 이름이었다. 개똥이, 만득, 언년 등... 그리고 소작농(농노)은 주인 성씨가 李 씨이면 “李가네 돌쇠”, 金 씨이면 “金가네 마당쇠”와 같이 불렸다.

 

또한, 관청의 대장에 등재된 성(姓)씨인 양반들 자손은 군역(軍役) 의무에서 면제되어왔다. 그러나 근대화 이후에는 군역 등에 차별을 둘 필요가 없어진 결과 성씨 관리를 각 문중에서 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모두가 성(姓)을 갖게 된 결과 그 질서가 혼란스러워지자 일제강점기에는 족보를 본보(本譜)와 검증이 불가한 별보(別譜)로 구별하였는데 별보 분량이 본보보다 월등히 많았다는 기록이다. 이후 현대에 이르러서야 문중들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자연스럽게 본보와 별보의 구분이 없어졌다.

 

갑오경장(甲午更張)의 신분제 폐지로 전 국민이 성(姓)을 갖게 하여 신분차별을 타파한 결과 일부에서는 천민도 성(姓)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것은 옛 천민 조상의 신분을 상승시켜 양반화하고 사료(史料)에 등재하기 위하여 임의로 성을 부여한 결과로 봄이 타당하다.

 

‘漢天子 묘’ 명칭에서 묘 주인공이 천민이었다면 성이 ‘한(漢)’씨일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 우리나라 ‘漢’씨는 극히 소수로 중국에서 유래한 성씨인데 어느 시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 확실치 않다. 한편, 한자가 다르지만 북산면 내평리 한터마을의 한씨 집성촌에서 머슴살이를 했다하여 "韓가네 OO"을 부여받았을 가능성도 열어두기로 한다.

 

오히려 춘천 지역에서 우두산 소슬 묘와 함께 한천자(漢天子) 묘는 ‘중국 明나라 태조인 주원장의 조상묘’ 일 것이라는 일화가 사람들의 관심 속에 회자되고 있는데, 이 경우에는 주원장의 출신 신분과 명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漢’이라는 한자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우두산 소슬 묘의 기원’에 대한 2019. 5. 14자 칼럼 참고, 소슬묘는 일본 건국과 관련한 왕자 숙솔의 무덤)

 

중국의 사료(史料)에 따르면,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은 1328년 10월, 중국의 남동부 남경(南京) 인근에 위치한 호주(濠州)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떠돌이 소작농의 3형제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명나라를 세운 '입지전적 인물'로, 5,000년 중국 역사의 수많은 황제들 중에서 비천한 신분 출신은 한(漢) 나라를 건국한 유방과 명태조 주원장 두 사람뿐이라 한다. 유방은 농민 집안 출신인 반면, 주원장은 그보다 더 신분이 낮은 소작농 집안 출신으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서쪽에 기반을 둔 진우량과 동쪽에 이웃한 장사성이 있었다. 진우량은 쿠데타로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한(漢)'이라고 했다. 한편, 장사성은 가장 번화한 평강(平江) 일대를 점령한 다음 소주를 중심으로 호주, 상주(尙州), 항주(杭州) 등 풍요로운 지역을 넓게 장악하고 있었다.

 

결국 남아있는 원나라의 세력과 주원장, 진우량, 장사성의 네 세력이 천하를 두고 서로 각축을 벌였다.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에서 가장 먼저 균형이 깨진 것은 주원장과 진우량의 관계였다. 한(漢)왕을 자처하던 진우량은 막강한 선단으로 양자강의 수로를 지배하고 있었다.

주원장 진영은 대규모의 함대를 보유하지 못하였으니 궁여지책으로 수백 척의 고깃배를 동원해서 수전에 응했다. 이것이 바로 당시에 최대 명승부 중 하나인 파양호(鄱陽湖) 전투이다. 파양호는 양자강 남쪽 장시성(江西省)에 있으며 여러 개의 지류가 모이는 곳이다.

 

1363년 양측은 이곳에서 사흘 밤낮 동안 치열한 격전을 치르며 양측에서 엄청난 전사자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주원장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행운은 주원장의 편이었으니, 진우량이 화살에 맞아 전사함으로써 주원장은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게 되고 漢나라를 평정하게 된다.

 

결국 주원장의 우상이었던 유방의 ‘漢’나라와 후대의 진우량의 ‘漢’나라가 ‘漢天子’와의 연관 실마리일 가능성이 있다.

 

걸출한 인물들이 몰락하는 계기가 그러하듯 막강한 전투 선단을 가진 漢의 황제 진우량의 지나친 자부심은 패전의 원인이 되었다. 반면, 주원장은 태생적으로 내세울 것이 없었으니 그에게는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으며 이것은 주원장의 경쟁자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역사 속에는 비천한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예가 많은데, 그렇게 성공한 자들이 수치스러운 과거를 대하는 태도는 양면성이 있다. 비천함을 극복하는 과정이 자랑스러워 후대의 귀감을 삼으려 하든가 아니면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고 숨기든가 둘 중 하나이다. 주원장은 아쉽게도 명나라를 건국한 후에 비천한 출신에 학식을 갖추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호람의 옥(湖藍之獄)'이라고 하는 폭정으로 수 차례 수만 명의 인명을 가혹하게 학살하였다. 특히 '문자의 옥(文字之獄)'이라는 역사상 유래 없는 황당한 참극을 만들어냈다.

 

‘문자의 옥’이란, 명태조 주원장의 과거를 연상시킬 수 있는 모든 글자의 사용을 금하였던 규정으로 전무후무한 어이없는 것이었는데, 이를 어긴 많은 신하들을 처형하였던 참극이다.

그의 황각사 탁발승(가가호호 다니며 경을 외우고 보시를 받는 승려) 시절과 관련이 있는 중 승(僧), 대머리 독(禿), 빛 광(光)과 황건적 시절을 연상시키는 도둑 도(盜), 도둑 적(賊) 등의 문자 사용을 금지하였다. 또한 승(僧)과 중국어 음이 같은 날 생(生)과 (賊)과 글자 모양이 닮은 곧 칙(則)이 추가로 사용 금지되었다. 이외에도 길 도(道), 다를 수(殊) 같은 문자와 제비(帝扉)와 같은 단어들을 추가하면서 금지어의 수가 계속 증가하였다.

 

중국의 고궁박물원(자금성)의 남서쪽 코너에는 남훈전(南薰殿)이 있다. 옛날 요(堯) 임금 때 정남풍이 불어 사람들이 낙원성세(樂園聖世)를 누렸다 하여 그곳의 궁전을 ‘남훈전’이라 하였던 유래를 따와 명나라 때 건축하고 ‘남훈전’이라 하였는데, 황제와 황후의 초상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주원장 초상

대개는 황제마다 화상(畵像) 수가 1폭이 보통이고 많아야 3폭인데 유독 명태조 주원장의 화상은 13폭이나 된다. 그중 긴 턱에 곰보자국 가득한 추남상(일부는 이를 용상龍相이라고 한다)이 많은 반면, 중후한 용모의 초상도 있다. 비록 생김이 다른 13폭의 초상이 있지만 그 원인은 아직도 미궁이다.

주원장이 신중한 반면 의심이 많아 늘 자객들의 암살을 경계하였는데 자신의 초상을 괴이하게 묘사하고 배포하게 하여 자객들이 자신을 암살하기 어렵도록 하였다는 후대 선비들의 기록이 있을 뿐이다.

 

아무튼 주원장의 출신부터 일생에 걸쳐 계속되는 왜곡과 철저한 숨김 등 의혹 투성이 행적으로 보아 춘천 지방의 한천자(漢天子) 전래 내용이 전혀 허구(虛構)라고 하지는 못할 듯하다.

 

한천자 묘의 구전 내용

한천자 묘의 전설에 관한 내용이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그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보다 더 세세한 내용은 그 마을에서 실제 구전되던 전설일 것이다.

 

한천자 묘 안내판

고려 후기 춘천의 지명은 안양도호부(安陽都護府)인데 그곳 소양강변의 북산면 내평리(지금은 수몰되었다)에 한(漢)씨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스님 두 명이 찾아와 하룻밤 쉬어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자, 주인 한씨는 머슴 방이라도 좋다면 거기서 묵고 가라고 했다.

 

머슴방에 봇짐을 푼 스님들은 머슴에게 달걀 세 개만 구해 달라고 하였다. 머슴은 스님들이 육식을 못하니 대신 달걀이라도 먹으려나 보다 싶어 먹기 좋게 쇠죽 끓이는 솥에 삶아서 전하였다. 머슴은 스님들이 자신이 잠들기를 기다리는 눈치를 채고 자는 체하자, 이윽고 스님들이 속삭이는 대화를 그만 엿듣게 되었다.

 

“가리산 명당 터에 달걀을 묻은 후 축시(丑時;오전 1~3시 사이)에 부화돼 홰를 치면 천자가 나오는 터가 틀림이 없고, 인시(寅時;오전 3~5시 사이)에 부화하면 천자는 아니되 임금은 날 자리일 것이야”

 

이 소리를 엿들은 머슴은 ‘삶은 달걀에서 병아리가 나올 리 없지’ 하면서도 한밤중 스님들이 일어나 집을 나서자 머슴도 몰래 스님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스님들은 가리산 중턱의 어느 산자락에 이르러 달걀을 파묻어 놓고는 부화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천자가 나온다는 축시가 지나고 임금이 나온다는 인시까지 지나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어느덧 묘시(卯時;오전 5~7시 사이)가 되었는데 때마침 삶은 달걀을 묻어 놓은 곳에서 닭이 튀어나오며 힘찬 날갯짓을 하자 스님들은 투덜거리며 일어났다.

“에이 헛수고로세, 하필 묘시에 닭이 나왔으니 이곳은 천자도 임금도 나지 못할 곳이 아닌가.”

그런데 한 스님이 못내 아쉬운 듯하면서 혼잣말을 하였다.

“닭이 묘시에 튀어나왔더라도 금관(金棺)을 쓰고, 황소 백 마리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하관 할 때 투구와 철갑을 입은 사람이 곡을 하면 천자가 나올 수 있는 명당이 될텐데... 그런 지극한 정성을 쏟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더니 두 스님은 산을 내려가 버렸다.

 

그 후 머슴은 스님들의 말이 사실일 것이라고 믿게 되었고,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시신을 그곳에 이장하기로 결심했다. 천자는 커녕 역적이 나든 말든 종놈의 신세보다야 낫지 싶어서였다. 한동안의 궁리 끝에 머슴은 금관 대신 노란 귀리로 시신을 싸고, 윗옷을 벗어 들고 이를 잡기 시작했는데 이가 머슴의 피를 많이 빨아먹어 그 크기가 엄청났다. 머슴은 무심코 ‘어따 이놈의 이들 꼭 황소만 하네’ 하고 소리를 연발하며 이를 백여 마리 잡아 무덤 앞에 떨어뜨렸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머슴은 황소 대신 황소만한 이를 백 마리나 제물로 올린 셈이 되었고, 이제야 아버지의 유택을 마련해 드렸다는 안도감과 함께 하산하였다.

 

그리고 나서 며칠 후 한밤중에 뇌성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빨리 일어나 집을 떠나라.”

머슴은 그 소리에 너무 놀라 급히 산으로 올라갔다. 얼마 후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온 동네가 삽시간에 물에 잠겨 버리며 머슴이 살던 마을과 전답이 흔적 없이 홍수에 사라져 버렸다. 겨우 목숨을 구한 머슴은 살길을 찾아 북쪽을 향해 끝없이 올라갔다. 그러자 어느덧 국경에 이르게 되고 중국 땅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때 중국에서는 천자가 죽고 후사가 없어 독특한 방법으로 새 천자를 구하는 중이었다. 관청에서 길가에 짚으로 만든 북을 걸어 놓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쳐보게 했다. 천자가 될 사람은 짚북을 쳐도 북소리가 날 거라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북을 쳐보았는데 역시나 소리가 나지 않는 광경을 보던 머슴은 그냥 지나치려는데 관리가 머슴에게 ‘너도 사내자식이니 한번 쳐봐라’하고 농담처럼 말했다. 얼떨결에 북채를 쥔 머슴이 힘껏 북을 내리치자 놀랍게도 ‘쿵, 쿵, 쿵’ 하면서 짚북이 울렸다. 관리는 깜짝 놀라더니 이내 땅에 이마가 닿도록 엎드리고 머리를 조아렸고 머슴은 중국의 천자가 되었다. 이후로 머슴이 살던 마을은 ‘한터’로 부르게 되었고, 그 묘소는 ‘한천자 묘’가 돼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중국의 천자가 된 후로는 부친의 묘소를 찾기 위해 사신을 보내 부친의 묘소를 찾았으나, 나라에서는 묘소가 이곳에 있다고 전해지면 속국이 될까 두려워 "한국에 지리산은 있어도 가리산은 없다"고 속여 돌려보냈다는 사연도 전해 내려온다. 또한, 중국에서 묘를 단장하려고 사람을 보냈지만 산이 깊어 묘를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MBC 방송 신비한TV서프라이즈에 소개되었던 내용으로 “한천자 묘(강원도 춘천시 소재)는 중국 최고의 황제 중 하나라 일컬어지는 주원장의 조부 묘로도 알려져 있다. 즉 묘의 주인이 정확히 주원장의 조부 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바로 명의 태조 주원장이 고려 출신이었다는 가설이 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가장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뒷받침할 수도 없는 것이 주원장의 조부인 주초일이나 부친인 주세진이 중국을 벗어났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보도한 바 있다.

 

누군가 정성으로 올린 스테인리스 잔과 간단한 과일이 묘 앞에 놓여 있다. 수백 년간 그 차림이 끊이지 않았던 듯 보인다. 심마니들 사이에서는 매년 이곳을 제일 먼저 벌초하는 사람이 산삼을 캔다는 믿음이 있으며, 일반인들도 가장 먼저 잡초를 뽑아 주면 그 집안이 한 해 동안 운수 대통한다는 소문이 나 있다. 그 덕분에 묘는 잡초가 자랄 틈이 없이 관리되고 있었다. 

 

혈 뒤의 잉(孕) 또는 현무정 玄武頂

또한, 명당 묘 덕을 보려는 사람들의 암장(暗葬)이 빈번했다. 마을에서는 가뭄이나 마을에 흉사가 계속되면 천자 묘를 파묘해보았는데, 그때마다 누군가 몰래 묻어 놓은 시신이 나오곤 했다고 한다.

특히 파묘 시 보았던 광중(壙中)의 형태는 특이하게도 널따란 암반이 누워있는 사람 형상으로 파여 있어 자연스레 석곽 구실을 한다고 하였다.

 

한천자 묘의 풍수 해석

한천자 묘는 백두대간 오대산에서 한강기맥으로 분지 하고 계방산을 거쳐 흥정산에서 다시 춘천지맥으로 분지 한 후 응봉산 백암산 소뿔산을 지난 후의 ‘가리산’을 주산(主山)으로 한다.

 

하나의 진혈(眞穴)을 맺기 위하여는 혈장 뒤로 이어지는 내룡(來龍)과 그 내룡을 가능하게 하는 높고 웅장한 산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산을 혈(자손)의 입장에서는 조상이 되는 산이라고 하여 조산(祖山)이라고 한다. 조상(조산)은 마치 사람에게 부모(부모산), 조부(소조산), 중시조(중조산), 시조(태조산) 등 여러 조상이 있듯이 상응하는 여러 조산이 있다. 조산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혈 뒤로 이어지는 모든 산’이라고 할 수도 있다.

특히, 태조산에서 시작한 용이 맨 처음 제일성을 기봉한 후 수많은 조산을 거쳐 결혈하고자 제일성과 똑같은 소조산(주산)을 기봉 한다. 이를 제일성과 혈을 서로 응하게 한다 하여 응성(應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제일성 역시 석산 목성 이리라.

 

‘가리산’이라는 명칭이 있으니 주산(主山)을 소조산(小祖山)이라고도 하는데, 혈장 뒤 2~4절 정도에서 솟은 高大한 산으로 그 일대를 관장하고 통제하는 산이다. 金형으로 둥글거나(圓) 木형으로 뾰족하거나(尖) 土형의 네모(方) 형태가 이상적이다. 소조산은 내룡의 근원, 혈의 결혈 여부, 혈의 크기와 성격 및 규모, 명당의 크기, 지기(地氣)의 종류, 국세의 크기를 나타낸다. 즉 조산이 특출하면 용(龍)도 역량이 크고, 반대로 빈약하면 용도 역량이 미약하다고 본다. 따라서 조산이 높고 크면 생기가 왕성하고 음덕이 오래도록 지속된다.

 

소조산(小祖山)은 혈(穴)을 맺는 내룡(來龍)을 직접 출맥 시킨 산으로 풍수지리에서 매우 중요하다. 마치 크고 튼튼한 나무(태조산이나 중조산)라도 부실한 가지(소조산) 끝에서는 그 열매(혈)가 제대로 열리지 못하는 이치이다.

수백 리 혹은 수십 리에 걸친 중조산을 거치며 과협, 기복, 박환(剝換), 개장(開帳), 천심(穿心) 등 많은 변화를 통해 환골탈태(換骨奪胎)하면서 억센 기를 정제시키고 순화시키는데, 수많은 변화 속에서도 근본이 되는 오행 정신은 일관되게 변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기세가 정제되면 혈을 맺기 위해 단정하고 수려한 산봉우리를 일으킨다. 이를 주산(主山) 또는 소조산(小祖山)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소조산이 오행 중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 혈의 형태가 결정되는 것이다.

 

한천자 묘의 소조산(石山)은 목성(木星)으로 보아 유두혈(乳頭穴)이어야 진혈인데 삼길성(三吉星) 중 하나로 한천자 묘의 혈(穴) 형태 역시 유두혈이다.

특히 주변 사(砂)보다는 본신 소조산의 형태가 혈에 직접적이고 절대적으로 영향을 주는데, 소조산이 극귀한 형태로(大貴砂) 목성이 겹으로 있는 쌍귀봉(雙貴峰)이다. 쌍귀봉은 천궐(天闕)이라 하는데 ‘천제(天帝)의 거처’로 알려져 있다.

또한, 멀리서 보는 소조산은 익선관(翼蟬冠) 형상이다. 익선관(翼蟬冠)은 관모의 일종으로 명나라, 조선, 대한제국의 황제 등이 평상복인 곤룡포와 함께 착용한 관이다.

 

가리산과 익선관

소조산 아래에 부모산(石山)이 기봉 하고 결인속기한 후 진혈을 맺었다. 봉분은 정확히 혈에 일치하는데, 혈권(穴圈)에 비하면 봉분이 작고 초라하게 보이는 외관이다. 땅속의 혈기에 곱절 정도 넓은 생기가 중복되는데 그 생기 권역이 60m 이상의 광역이다. 혈권으로 보면 춘천 우두산의 소슬묘나 중국 집안의 광개토대왕릉과 비슷한 대단한 크기이다. 아마도 능선 끝부분에 있는 당판과 봉분의 작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다 보니 빙산의 일각처럼 한천자 묘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또한, 북동쪽으로 터 있는 공간이 안(案)인데 멀리서부터 흘러오는 소양강 물길을 역으로 거슬러 유입되는 기(氣)가 혈장에서 응집되고 있다.

다만, 내당수가 좌우에서 흘러와 묘의 전순 아래에서 합수하고 용호의 사이로 직출하는 흉함을 청룡과 백호가 마치 두 손바닥을 조밀하게 모으고 설기(泄氣)를 막고 있는 듯한 형세이다. 멀고 높은 허공을 보는 안(案)과 전순이 당판을 든든하게 받쳐주며 거수처(去水處)를 가리고 있다. 바위가 많으면서도 후부(厚富)한 전순으로 보아 말자(末子)에게 미치는 발음이 유독 크다 하겠다.

 

전순

만약 평지의 경우라면 빈약한 전순에 파구가 열린 Y자의 ‘코뚜레혈’은 극히 흉함이었을 것이다.

 

묘의 주산과 현무로 보아 중앙으로 출맥한 끝자락에 힘이 응축된 정돌취기(正突聚氣) 입수이다. 내백호와 두 겹의 내청룡이 유순하게 합장하듯 혈장을 조밀하게 에워쌌는데, 정돌취기 입수일 경우는 자손 모두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 또한, 당판 전체가 암반이니 그 역량에 따른 발음은 극귀함이다.

 

한천자 묘 지형도(큰 원은 소조산, 작은 원은 혈)

그러나 전술한 바, 억센 기가 정화 순화되지 않아 석중토혈(石中土穴)인 묘역을 제외하고는 도처의 바위와 돌이 충(沖)하는 살기가 느껴진다. 아마도 이 묘의 발음으로 명의 황제에 등극하였다면, 수차례의 학살로 수많은 인명을 죽여야 했던 참극의 단초(端初) 내지는 징표(徵表)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한천자 묘는 해발 630m의 고지(高地)에 소조(가리산)의  면(面) 반대편 등줄기(背)에 피어난 혈이다. 결국 일반 풍수사의 안목으로는 식별하기 어려운 괴교혈(怪巧穴)이다. 참으로 괴이하고 기이한 혈이다. 

 

그러나 풍수적 고찰로 보면 한천자 묘는 가히 대륙의 황제 배출을 상정(想定)할 만하다 하겠다. 

------------------------------------------------------------------------

한천자 묘에 예를 갖춘 후 묻는다.

 

그대는 고려 때 사람인가? 1300년대 인가?

“고려 때 사람이지만 연대는 모르겠다.”

 

그대의 성씨는 한 씨인가, 아니면 무슨 성씨인가?

“한 씨가 아니다. 잠시 머뭇거리는 기색이다(성이 없었다는 의미인 듯)”

 

한천자는 명태조 주원장이고, 그대는 한천자의 조부인가?

“아들이 주원장이다(확실하게 답함), 나는 한천자의 아버지였다.”

 

이곳에 그대는 혼자인가, 그대의 부인은?

“혼자이다. 내자(內子)는 한참 먼저 세상을 하직하였다.”

 

묘의 기생명체(氣生命體)와의 교감과 대화 내용이다. 

사실만을 말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만물은 생명체이다. 기생명체도 엄연한 생명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