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이야기(칼럼)

청동기 시대의 풍수지리 1

풍수명인 2019. 8. 1. 21:14

안양시 관양동 소재 선사유적지를 둘러보았다.

역사(歷史)의 사전적 의미는 “인류 사회의 발전과 관련된 의미 있는 과거 사실들에 대한 인식 또는 그 기록”이라 한다. 따라서 역사는 대부분 문자 기록에 기초하여 과거 사실들을 파악한다. 반면, 선사(先史)는 인간 생활에 관련한 문자 기록이 없던 시대로 문헌 기록 등이 전무하여 유적, 유물 등을 통하여 해당 역사를 유추한다.

선사 시대는 일반적으로 도구를 기준으로 삼아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시대로 구분한다. 관양동 선사유적지에서는 구석기시대 뗀석기부터 조선시대 자기류까지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중심 시기는 청동기 취락유적으로 추정한다.

현재 기원전 10세기 이전에 한반도에서의 청동기시대가 개막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 여러 지역의 유물들은 청동기를 거치지 않고 석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바로 이어지기도 하였으니, 상대적으로 희소하다는 이곳 청동기 유적이 고고학계의 중요한 자료이다.

 

 

우리나라 풍수의 기원에 대한 여러 주장이 있다. 일설은 신라 말 도선 국사가 중국에서 도입했다 하는데 설득력이 없다. 왜냐면 이미 『삼국사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풍수에 관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신라의 설화 기록으로, 신라 제4대 왕인 석탈해는 용성국 왕과 여인국 왕녀 사이에서 알로 태어나는데 불길하다하여 바다에 버려진다. 바다에서 떠다니던 중 기원전 19년에 아진포에서 한 노파에게 발견되고 후일 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중요한 핵심은 석탈해가 경주 남산에 올라 반월성의 터를 발견하고 거짓 계략으로 터 주인인 호공으로부터 땅을 빼앗았다는 점이다. 이 기록으로 보아 풍수지리 중 물형 사상이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라 초기부터 왕궁 또는 성벽 축조, 집터 잡기 등에 풍수가 적용되었다는 기록이다.

 

다음은 백제의 사신(四神) 벽화이다. 여기에서 묘사된 4 신은 풍수지리에서의 청룡, 백호, 주작, 현무로 명당을 둘러싼 사격을 의미함과 동시에 체계화된 오행론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왕이 죽으면 고분 안에 배를 만들고 왕의 시신을 안치하였는데, 이는 사자가 배를 타고 사후 세계로 갈 것이라는 풍수에서의 사후 세계관으로 백제의 풍수 존재를 알 수 있는 예이다.

 

고구려 3대 대무신왕(재위: 18~44) 때의 기록을 보면, “까마귀는 검은색으로 흑색은 북방을 상징하는데 남방 색인 붉은색으로 바뀌었으니, 남방의 고구려가 북방의 부여를 병합할 징조이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부여를 쳐서 복속시켰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고구려 2대 유리명왕(재위: BCE, 19~18) 29년의 사료에는 “검은 개구리와 붉은 개구리가 모천이란 냇물에서 떼-싸움을 하다가 검은 개구리 무리가 패하였다. 검은 것은 북방의 색이니 북부여가 패망할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 기록을 미루어보아 이 시기에 이미 오행 원리를 원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풍수의 기원을 삼국 시대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 시기를 삼국 시대보다 훨씬 더 이전인, 기록이 없던 선사 시대쯤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수혈주거

 

관양동의 청동기 시대 잠자리 유적에 대한 풍수적인 검토 결과, 폭 2 m 내외의 두 줄기 맥이 각각 수혈주거(竪穴住居, 지면에 구덩이를 깊이 파고 평면을 만들어 그 위에 천막이나 지붕을 만든 주거 형태)의 중앙에 혈을 맺고 있다.

다만, 청룡의 흔적이 없고 백호도 부실함, 그리고 길게 내려간 산줄기의 상부 9부 능선에 맺힌 혈로 보아, 우리가 드물게 보는 ‘기룡혈(騎龍穴, 혈은 용맥이 끝나는 용진처(龍盡處)에 주로 맺히는데, 기룡혈은 용맥의 중간 부분에 맺히니 마치 혈이 용을 타고 있는 형상이다.)임이 확실하다.

 

기룡혈은 진혈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혈을 맺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거팔래팔(去八來八)의 사(砂)가 혈의 상하에 있어 위 쪽의 砂는 생기를 잘 내려보내며 아래의 砂는 생기를 막고 역류시켜 혈을 만들고 안산이 되기도 한다.

이곳의 선익(승금)은 혈장을 잘 감싸는 최상의 것이나, 아래의 전순 부분은 도로에 잘려 원형이 크게 훼손된 듯하다.

 

선익(승금)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명문가의 적지 않은 선대 묘들이 기룡혈처럼 보이지만 비혈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기룡혈은 십중팔구가 가혈이라 할 정도로 심혈이 어려운 혈이다

 

이곳의 혈은 산정상부 가까이 맺힌 특이함이 있으니, 문명의 이기와 이론에 젖어있는 현대 풍수인들이 더더욱 심혈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아마도 고라니나 꿩처럼, 청동기인들은 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정확한 심혈을 하였다고 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작금에 발달한 문명의 이기와 논리의 취약함 그리고 그것에 흠뻑 젖어있는 현대인들, 그들과 대비되는 청동기인들, 그들은 진정한 풍수도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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