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이야기(칼럼)

윤회의 대차대조표

풍수명인 2011. 10. 10. 22:10

풍수지리를 맹신하고
명당에 집착하는 정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신앙에 가까운 신념이다.

조상 묘의 산화에 관한 현상은
사람의 길흉화복과 긴밀하고

대단히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한편, 선대 묘의 산화에 앞서
나와 (조상)이 지은 전생의 업은
사람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또한, 조상 묘와 업은 물론
의식주를 위하여 하는 행위 자체도
길흉화복을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대개는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주는 요인을 풍수 분야 외에는
크게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그 길흉화복 현상이 맞지 않아
사람들이 풍수지리를 반신반의하고
미신이라고 하는 한 원인이다.
 


부실로 판명한 금융기관
지점장의 자살,
알토란같은 돈을 맡긴
사람들의 피맺힌 절규,

성 상납 강요를 견디다 못한
연예인들의 죽음,
장애학생을 상습 성폭행한 교사들,
그 탓에 신체장애에 더하여
처참하게 짓밟힌 존엄성, 
 
치사율 1위의 암으로 죽어 가며
자신의 운명을 개탄하는 가장과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한 
동승한 식구 간 생사의 갈림, 

명령으로 전장에서
하릴없이 죽어가는 군인들,
팔장 끼고 그 명령을 내리는
사욕스러운 지도자,

정보의 선점이나 속임수로
야비하게 먹고 처연하게 먹히는
경제적 강자와 약자,

수 없는 결혼과 이혼에 따른
인연과 한(恨),

그 외에, 언론보도의 사각지대와
야생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가해행위와 그 결과,

과거의 피해에 대한 보복이
부당하다 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응징을 교차 반복하는
역사의 수레바퀴,

수일이 멀다 하고 발생하는
사람 간 갈등과 해악으로 인한  
불의와 불균형이 만연하는 세상을
우리는 살아간다.

대단히 혼란스럽고
뒤틀린 세상이지만,
선의지로 노력하면
바로 잡힌다는 희망으로
속아 사는 사회이다.

 



이러한 연유로 ‘신은 죽었다.’

‘양심을 지키고 살면
많은 손해를 볼뿐더러
인생이 편치 않다.‘라고
고뇌한 후 타락해 버린다.

사실은 신이 죽은 것이 아니고,

윤회하는 생물체에 서린 업 때문에 
일어나는 인과응보를 지켜볼 뿐
그 철칙을 건드리지 않는다 함이
옳은 말이다. 

진정한 ‘나’는 ‘영’이요
윤회의 주체도 ‘영’이니
한 생의 주체도
육으로서의 ‘나’가 아니다. 

그 ‘영’이 윤회를 반복하는
수억 겁의 세월이
대차대조표에 기록하는
생(生)의 범위이다. 

그렇게 장구한 세월 동안
만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연’과
행위를 한 선행 및 악행의 무수한 ‘업’,
그에 따라 주고받는 업의 중간정산이
매번 육생(肉生)에서 이루어진다.

바꾸어 말하면,
대차대조표상의 대여금 회수와
차용금 변제의 ‘살’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대여금은 전생의 선행이요
차용금은 전생의 악행에 해당한다.

인과응보(因果應報)를 사전에서는
“전생에 지은 선악에 따라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선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서 행과 불행이 있는 일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인과응보의 법칙은 깨어지지 않는다.
다만, 육으로 사는 동안
우리가 수긍할 수 있는
온전한 '업'의 정산(定算)을 다하기에는 
육체의 삶이 너무 찰나이다.
 

따라서 한 장에 도식화되어 있는 
'육생(肉生)의 대차대조표'가 쌓여서
빈틈없이 연결한 수많은 페이지의
'영생(靈生) 장부'를 구성하는 것이다.

고로 현생의 불행과 악연을
그리 억울해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저 남보다 잘나가면
‘전생에 나쁜 업이 많지 않았었네.’ 
반대로 평생을 불운하게 
지지리도 펼치지 못하고
억울하게 피해만 보았다면
‘나와 (내 조상)이 지난 생에서 많은
악업을 만들었으니 당연하지‘
라고 슬기롭게 자조(自嘲)함이
적절하지 않겠는가?

커다란 업은 느끼지도 못할 만큼
우리를 짓누르고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사소한 오해나 미움도
빚쟁이처럼 ‘업’으로 붙어 있으니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다. 

중요한 것은,
장차 윤회할 자신의 여러 생을 위해
신중히 생각하고 현명하게 행위하도록
가치관과 태도를 가다듬고
또한, 좀 더 멀리 보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기체(氣體)로 이루어진 ‘업’은
검버섯이나 혹 또는 악성 종양같이
피부에 섞여 분리할 수 없게
깊숙이 박혀 있다.

‘업’으로 생기는 삶의 부침(浮沈)을
겪는 것은 불가피하나,
나쁜 운이 닥치는 이치를 알고 
체념함에 그치지 않고, 
악업의 ‘살(煞)’이 나타나기 전에
업장 소멸하는
한 차원 높은 수도
한다면 훨씬 더 좋지 않겠는가?

신은 피조물과 그 삶의 질서를 
그리 허술하게 만들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은 보고 느끼는 일부만을
받아들이고 해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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