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을 그리고 맨 마지막에 눈동자를 찍어 넣다. 즉 일의 성공을 도모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을 완성시키는 것을 ‘화룡점정’이라 한다. 화룡점정의 출전인 《수형기(水衡記)》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양(梁)나라 사람 장승요(張僧繇)는 장군과 태수의 벼슬을 지냈지만 벼슬을 마친 뒤엔 그림을 그리며 지냈는데, 붓만 들면 세상 모든 것을 마치 실물처럼 그려냈다. 어느 날 금릉(金陵:남경)에 있는 안락사(安樂寺)라는 절의 주지가 그에게 절 벽면에 용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장승요가 부탁을 수락하고 붓을 든 후 시간이 지날수록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용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니, 살아 움직이는 용을 보는 듯 구경하던 사람들은 그 솜씨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데 그는 용의 눈을 그려 넣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한 사람이 그 이유를 물으니 “용에 눈을 그려 넣는(畵龍點睛) 순간 용이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이오.”라고 그가 답했으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눈동자를 속히 그려 넣으라고 채근하였다. 결국 그가 용 한 마리에 눈동자를 그려 넣자, 돌연 천둥번개가 치며 벽을 박차고 튀어나온 용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벽에는 날아가버린 용의 자리는 비어있고 눈동자를 그려 넣지 않은 용만 남아있었다.』
이때부터 가장 요긴한 데를 완성하여 일을 마무리함을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또한, 사소한 바가 전체를 돋보이게 함을 빗대어 표현하기도 하고, 개략적으로는 잘됐지만 어딘지 모르게 한두 군데 미진한 듯하면 ‘화룡에 점정이 없다’라고도 한다.
한양 천도 이후 우리나라의 국사를 돌이켜 보자. 초기에는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 개경 환도, 임진왜란,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세도정치, 극심한 붕당정치, 쇄국정책,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 일제강점기, 고종 독살(설), 6·25 전쟁, 근현대 최고 통치자들의 비극적 말로, 작금의 나라 안팎의 수모(受侮)적인 정세 등 굵직한 사건만 나열하였다. 풍수적으로도 긴밀하게 관련된 이슈들이다.
따라서 서울의 풍수지리적인 화룡점정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풍수지리 음양론으로 본 한양 터는 음기가 왕성한 산맥(풍수지리에서 움직임을 기준하여 정적인 산은 음으로, 이동하는 기운이 많은 평지나 물은 남성처럼 활발하다 하여 양으로 본다.)에 둘러 쌓인 곳이다. 즉 장풍에 유리한 곳이다. 또한, 옛날의 전쟁터에서 산맥은 외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좋은 자연 차폐물이다. 오늘날 후진국 빈국 등 저개발국가들은 내륙 깊숙이 은둔한 듯한 지역에 수도가 대부분 위치하고 있다. 내륙의 산맥으로 둘러싸인 지역은 음양이 불균형을 이룬다. 내륙의 산맥 사이에 자리한 도시는 땅의 기운을 가두어 둘 뿐 외부와의 교류가 단절된 폐쇄적인 환경이다. 따라서 국방과학이 발달한 현대에는 수도를 지리적인 방어 목적으로 정할 필요성이 작아진다.
반면, 강대국이나 선진국으로 번성하는 나라의 수도 또는 대도시들은 바다에 면하거나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 즉 육지와 해양의 기운이 만나는 지역에서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만큼 진취적이고 개방적이며 활발한 음양의 흐름은 땅의 기운을 배가시킨다.
1394년 이래로 서울(한양)은 현재 위치에서 620여 년 간 나라의 수도로써 기능을 하고 있으니 전술한 지리조건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앞으로 참고할 사안일 뿐이다.
둘째, 풍수지리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또 하나의 이론이 산의 면배(面背)이다. 만물은 생명체이니 산도 생명체로 보아, 앞을 면(面) 뒤를 배(背)라고 한다. 따라서 산이 배한 곳은 흉지가 되고 산이 품어 안은 앞면은 좋은 터가 된다.
산이 면(面)한 곳이라 함은 산의 정상부가 머리를 숙이듯 수두(首頭)하거나 산이 감싸 안은 곳 또는 산의 좌우가 균형 잡힌 곳 등을 말한다. 그 반대는 배(背)한 흉지이다
시내 쪽에서 바라보면 북악산이 수두한 곳은 삼청동 일대이니 그 일대가 면이다. 그 반대인 경복궁과 청와대는 당연히 산이 배한 곳이다. 부모 격인 뒷산이 배(背)한 곳에 자리하여 마치 아이를 안고 있는 어른의 팔 밖에서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너는 내 자식이 아니야”라는 듯 버림받은 모습이다.
서울의 입체 지형도로 판단해도 가장 핵심이 되는 경복궁과 청와대의 위치가 화룡점정해야 할 곳과는 반대편으로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화룡점정을 한다고 하였으나 해야 할 곳을 찾지 못하고 빗나간 점정(點睛)을 하였을 뿐이다. 그 결과는 한양 천도 이래로 지속되는 국가적 위기와 환란이었다.
셋째, “명당은 스스로 지킨다.”라는 풍수 속담이 있다.
한양 천도 이후 나라의 법궁인 경복궁의 잦은 화재 소실 후 복구 비용으로 야기된 민생파탄은 조선 말기 왕조의 붕괴를 앞당기는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잠시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에 관해 살펴보자. 교태전은 세종 때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1553년 명종 때 경복궁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후 1555년 8월에 재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로 재차 소실되었다. 고종 치하인 1869년에 새로이 창건하였으나, 큰 화재로 창덕궁의 내전이 불타버리자 이를 복구하고자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서 재목으로 사용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90년에 다시 중건한 것이다.
왕자를 생산하는 극히 중요한 곳은 필히 길지중 길지를 택하여야 하는데, 지금의 강녕전과 교태전터는 한양의 주혈은 아니지만 방혈(旁穴)은 되리라 본다. “명당은 스스로 지킨다.”라는 풍수 속담에 비추어 파란만장한 내력을 보면 스스로 지키지 못한 듯하다.
서울에는 창덕궁 외에도 경복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 모두 5개의 궁궐이 있다.
1399년 정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개경 환도를 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소실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내고 조선총독부를 짓는 등 궁궐들의 수난도 빈번하였다.
또한, 왕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궁궐들을 떠돌았던 기록이 있다. 특히 산이 배한 곳으로 왕자의 난이 일어난 피비린내 나던 경복궁의 악몽을 왕들은 애써 피하였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굳이 막대한 재원을 들여 경복궁을 재건할 필요가 있었을까? 의문이다.
넷째, 풍수지리론으로 중출(中出)맥이론이 있다. 여러 지맥 중 가운데 맥이 피풍에 유리하니 주혈맥이라는 말이다.
창덕궁은 비교적 왕들이 오래 머문 궁궐이다. 그나마 주혈에서 내려오는 산의 면에 위치한 풍수적 지형을 갖추었다. 다만, 그 중출(中出)맥이 종묘에 이르기까지 뻗어내려 설기(泄氣)되고 피풍에 불리한 지세이지만, 경복궁으로 뻗어 내린 북악맥을 우백호로 하고 좌측 낙산을 청룡으로 하는 국을 만든다. 따라서 내맥(來脈)이 배하고 내백호가 없는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이 상대적으로 길지이다.
다섯째, 풍수에서는 명당 혈을 “귀부인이 발을 드리우고 앉아있는 형국”이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밖에서는 내부를 볼 수 없지만, 안에서는 밖이 훤하게 보이는 지형을 말한다.
지금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상징성이 있을 뿐이지만 경복궁의 풍수적 위치는 장풍이 잘되는 공간은 전혀 아니다. 반면, 지금도 국가 통치자의 공간은 국운을 좌우할 만큼 극히 중요한 사안이다. 지금의 국가 통치자 공간이 ‘귀부인’이 앉아 있는 은밀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전혀 아니다. 부모의 팔 바깥에 노출되어 삭풍을 견디며 어려움울 겪는 형국이다.
더구나 서울 사대문 안팎 일대에서 풍수적으로 자리가 될 만한 곳은 옛 무덤터는 아닌지 면밀히 검토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여러 제도권 풍수인들이 관여했을 듯한 통치자 관저 자리는 좋지 않은 기운이 감돌 것이다. 미국 백악관, 일본 황궁, 심지어 북한 태양궁의 풍수가 부러울 뿐이다.
한양 땅의 풍수적 화룡점정이 어긋난 결과이리라 본다. 결론은 화룡점정처의 위치이다. 다시 말하자면, 남쪽에서 보아 북악맥은 우측으로 수두하였으니 삼청동이 주혈지를 품고 있다. 현재 화룡점정처에는 그리 요긴하지 않은 용도의 시설이 소재하고 있을 뿐, 영웅의 출현을 막고 있다.
또한, 과거 한양의 조산인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아내고자 남대문의 남지(南池), 숭례문 현판, 광화문의 해태, 경복궁의 드므, 특히 경회루 축조와 연못의 용 두 마리(경회루의 건축원리를 설명하는 《경회루전도慶會樓全圖》에 따르면 불을 억제하기 위하여 주역의 원리에 따라 경회루를 건축하였다고 한다. 또한 화재 방지용으로 연못에 구리로 만든 용 두 마리를 넣었다고 한다. 용은 물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등 처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복궁뿐만이 아닌 그 주변의 민가들도 잦은 화마(火魔)로 인한 재난을 자주 겪어온 기록이 있다.
만약 경복궁을 삼청동에 축조하였더라면 남산과 둔지산이 화기를 내뿜는 관악산을 시야에서 가로막아 화마의 재난으로 시달리지도 않을 것이다.
바야흐로 얼마 전 용의 시대가 가고 봉황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국가 통치자 공간을 삼청동에, 가회동 계동 일대에 보조 공간을 조성한다면, 조선 이래로의 어두운 추억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늘로 박차 오르는 봉황을 상징하듯 서기(瑞氣)가 감도는 일등국가로 도약할 것이다.
풍수지리는 국가의 백년대계를 좌우할 최우선 사안이다. 600여 년 전의 화룡점정 실패가 한스러울 뿐,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붓을 들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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