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이야기(칼럼)

만대산 시조묘

풍수명인 2012. 11. 19. 00:22

2012 년 9월 25일 남해안 통영에서 용무를 마치고 상경길에 고령 만대산의 시조묘를 찾았다. 30여 년 전 호연회 초창기 시절에 단체로 답사하였던 아련한 기억에 의존하였지만 어렵지 않게 묘역 입구의 표석을 찾을 수 있었다. 수십 년 전과 지금은 산천을 보는 안목이 현저하게 차이가 있으니 현재 시조묘의 풍수적 고찰이 한동안 관심사이고 바람이었다.

 

백두대간이 추풍령 과협처(過峽處: 용맥이 진행하는 도중 잘록한 부분으로 기맥이 통과하기 어려운 곳)를 무사히 지난 후 덕유산을 기봉하기 직전 대덕산(大德山)에서 우측으로 분지하여 수도산과 가야산을 만들고 남하하여 만대산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만대헌 지붕 위의 만대산


따라서 대덕산은 태조산(太祖山: 용이 시작하는 산, 사람의 시조에 해당함), 수도산과 가야산 등은 중조산(中祖山: 태조산과 소조산을 이어주는 산으로 사람과 마찬가지로 여러 中祖가 있다) 그리고 만대산은 소조산(少祖山: 그 일대를 관장함,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산)이다. 소조산으로서의 만대산이 시조묘역을 다정하게 내려보는 국세이니 혈처가 필시 그곳에 있으리라 짐작하며 걸음을 재촉하였다.

 

<풍수 용어에 익숙지 않은 분들을 위하여, 되도록 쉬운 단어와 문장으로 기술하려 하니 지리 지식을 가지신 분께서는 읽으시는데 불편함을 널리 혜량하여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또한, 조상묘라 하여 사실을 왜곡하고 미화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닌 앞으로의 문중의 번영이지요, 특히 조상묘를 통하여 개인도 지리에 대한 기본 지식을 습득함이 의미 있고 효율적인 방법이니, 이를 토대로 개개의 발전을 도모함이 곧 문중의 영화로 직결됨을 염두에 두고 기록합니다.>

 

1. 청룡(龍)과 백호(虎)

 

입구에서부터 산자락을 살피니 가까이에서 겹겹이 묘를 감싼 청룡(靑龍: 亡者 기준으로보아 좌측에 있는 산줄기를 말함. 풍수지리에서는 방향을 항상 망자나 봉분기준으로 정한다)이 유정하고, 그 청룡을 다시 외부에서 감싸는 백호(白虎: 망자 기준 우측 산줄기) 역시 정겹게 다가온다. 따라서 전체적으로는 백호가 크게 환포한 백호작국(作局)이다. 


                      외백호의 끝자락 - 명당을 감싸는 길격이다.


                           묘역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본 청룡 자락 - 명당을 감싸며 내당수를 역수한다.


풍수 이론에서는 백호를 지손(支孫: 長子孫 이외의 자손), 여손(女孫), 서손(庶孫) 및 외손(外孫)의 길흉화복 예단에 활용한다. 만대산을 포함한 백호 자락의 왕성한 기세와 청격(淸格: 수려하고 깨끗함) 문필봉(文筆峰: 붓을 거꾸로 세운 형상으로 묘에서 보이면 글 잘하는 자손이 나옴)들로 미루어 훗날 해당하는 지손과 여손의 발음(發蔭: 조상의 묏자리를 잘 써서 운수가 열리고 복을 받는 일)이 대단하였으리라 본다. 왕성한 인왕산에 비하여 장자(長子)를 상징하는 미약한 낙산이 어우러져 경복궁의 명당을 만들었으니 장손이 아닌 지손의 왕위승계가 대부분이었던 조선의 역사를 잠시 떠올려 본다.

 

하지만 청룡 역시 근거리에서 시조묘를 여러 겹으로 정성스럽게 감싸 안고 있으니 우리 신(申) 사문(斯文)의 조상에 대한 지극한 효성과 순종을 상징하는 듯하다. 따라서 보기 드물게 좋은 청룡이다. 


                      세덕비


                      만대헌 


                      추모제 


2. 묘 위치의 고저(高低)

 

보통의 묘에 비하면 시조묘는 매우 높은 곳에 있다고 본다. 대학 등 제도권에서 연구 조사한 바로는, 묘가 낮은 곳에 있을수록 자손 수가 많아지고, 높은 위치일수록 자손이 그 수에 있어서 번성하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같은 한자의 평산 신(申)씨 시조인 신숭겸 묘(춘천 소재)는 산자락이 평지에 닿은 혈처에 있다. 연대가 앞선 원인 및 여러 고려할 요인이 있겠지만, 전체 신씨의 71.2%(약 50만)를 차지할 만큼 수에 있어 번창하였다. 우리(12만)의 4배를 웃도는 인구이니 묘의 고저가 자손의 번성에 영향을 미치는 바를 부정할 수 없으리라 본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자손의 숫자가 아닌 자질과 인물됨이니, 앞으로 개개인의 묘역(墓役: 묘지 조성)에 참고하시라는 뜻으로 기술하였다.

 

3. 장로(葬路)

 

풍수 용어로 장로는 ‘묘에 출입하는 길’을 뜻한다. 시조묘를 겹겹이 둘러싼 청룡 끝자락을 따라 굽이굽이 장로를 만들었으니 아주 길한 모양새이다. 달리 말하면, 장로가 구곡(九曲: 여러 차례 굽어도는 모양)하면 청룡 백호가 그만큼 명당을 조밀하게 감싸 안았으니 상급 용호라는 의미이다. 반면, 직선으로 장로를 내면 묘역에 축장된 생기가 쉽게 빠지고 바람이 들이쳐 생기가 흩날(飛散)리니 매우 흉한 경우이다. 


                      굴곡이 많은 장로


4. 묘역(墓域)

 

가. 통행 계단

 

묘역 아래의 추모제와 만대헌을 지나서 시조묘의 중앙에 있는 계단을 오르며 그 통행로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였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중앙은 신도(神道: 신이 왕래하는 길)이고 사람은 묘에서 보아 좌측에서 오르고 우측으로 내려가는 법도가 있다. 아마도 그 문중의 정성이나 수준을 가늠하기 쉬운 항목이 될 수도 있으며, 추가로 좌측과 우측에 인도용(人道用) 계단을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으리라 본다. 


                      통행 계단 -  빨간 표시 위치에 설치 필요


나. 망주석(望柱石)

 

봉분 앞의 양쪽에는 문인석(文人石: 묘를 수호하는 기능을 가진 문신의 형상)과 돌기둥인 망주석(묘를 기념하는 기능을 가진 석조물)을 세웠는데 오랜 풍상으로 이끼 낀 모습이다. 사진은 시조묘 아래 묘역의 망주석인데 망자를 기준으로 왼쪽은 해가 뜨는 동쪽이니 다람쥐가 망주석을 오르는 조각을 하고, 묘의 오른쪽은 해가 지는 서쪽을 말함이니 망주석의 다람쥐가 내려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운행 원리를 따라 사람의 통행도 동쪽에서 단에 오르고 서쪽으로 내려가는 이치이다. 이 경우 무조건 묘를 기준으로 하여 동서를 정하여야 한다. 즉 해가 뜨고 지는 자연 방위는 무시한다. 


                      장명등, 망주석 및 문인석 


                      좌측(해 뜨는 방향) 망주석 - 오르는 모습의 다람쥐 조각  


                           우측(해 지는 방향) 망주석 - 내려가는 모습의 다람쥐 조각


다. 승금

 

이어서 묘 윗부분의 생기가 들어오는 통로인 승금(乘金의 위치: 혈처 위쪽의 잔디가 끝나는 도톰한 곳)을 점검한바, 묘에서 보아 좌측으로 치우친 방향으로 기가 유입되고 있었다. 그 영향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승금의 상부 형태가 두 변이 각진 사다리꼴의 기이한 형태이다.

 

아마도 봉분이 둥근 금성(金星)이니 -승금을 혈성산(穴星山: 혈처 뒤의 산)으로 오인하고- 각진 토성(土星)으로 산역을 하여 오행상 ‘토생금(土生金)’의 상생원리로 봉분의 기운을 북돋우려 하였을 것으로 추측해 볼 뿐이다. 그러지만 어디까지나 승금에서의 ‘금’은 한자로 ‘金’이니 오행상 그 모양이 둥근 형태이어야 한다.

                      승금과 표석


                            산신석(山神石)  


라. 표석(標石)

 

또한 승금 바로 밑의 표석(진혈을 증명하는 바위나 돌을 일컬으며 흙 속에 견고하게 박힌 有根石이어야 함)이 가까운 곳에 혈이 있음을 증명한다. 만약 바위나 돌이 땅에 박히지 않고 놓여있는 상태라면 제거하거나 흙으로 덮어 흉함을 피하여야 한다.

 

마. 좌향 및 조안(朝案)

 

묘역에 오르면서부터 줄곧 시조묘의 좌향이 잘못되었음을 어찌 알려야 하나 고심하였다. 묘의 등받이가 편안하고 안정된 방향을 ‘좌(坐)’라 하고, 봉분이 어느 방위를 바라보느냐를 ‘향(向)’이라 하는데 자기에게 유정한 지형이나 사(砂: 묘 주변의 산)를 마주 보아야 한다.

 

향하는 산을 ‘조산’(朝山: 혈 앞쪽의 안산 너머로 높고 웅장하게 서 있는 산으로 주작이라고도 함. 부인, 친구, 신하, 손님격)이라 하는데, 가장 특출하고 자기에게 유정하게 순종하고 배반하지 않을 형태가 상격이다. 또한 ‘안산’(案山: 조산에 이르기 전 묘에서 가까운 곳에서 귀인의 책상처럼 놓인 산)은 묘보다 낮아야 하고 기울지 않으며 무정하지 않고 단정해야 한다.

 

시조묘는 위에서 설명한 어느 형태에도 맞지 않으며, 조산의 옆 경사진 곳을 마주 보고 있으니 주인으로서 응당 받아야 할 대우를 받지 못하고 무정한 상대방을 하릴없이 보고 있는 형국이다. 안산 역시 백호 능선의 비교적 평탄한 곳 옆의 경사진 곳을 마주하니 기울어진 탁자를 앞에 두고 있는 궁박한 처지이다. 



                      경사진 조안산과 적색 원 내의 파구처


묘의 좌나 향 그리고 안산, 조산, 청룡, 백호, 물길 등의 길흉을 논함은 허공을 통한 기의 교감을 평가함인데, 비록 혈에 묘를 쓰지 못했어도 주변과의 응기(應氣)가 좋으면 자손의 살림이 등 따시고 배부른 정도여서, 구하기 어려운 혈자리 대신 주변의 우호적인 산천의 형세를 많이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흔히 묘 앞의 전망이 탁 트인 시원한 조망을 좋다 하여 향을 정하는데 막연하게 허공 또는 먼 산을 응시하는 결과로 정작 가까운 힘 있는 산을 외면함이니, 전혀 내 것이 될 수 없는 밥상을 선망함 보다는 간소한 찬반이라도 확실한 내 밥을 지켜야 자손들에게도 발복이 미치는 이치이다. 즉 묘는 막연한 공간을 바라보지 않고 뚜렷한 대상을 향해야 하며 또한 경사진 지형 등 안정되지 못한 곳을 보지 말아야 한다.  

 

바. 파구처(破口處)

 

시조묘는 얼핏 보면 어느 한 구체적인 지점이 아닌 먼 곳을 향한 듯 그저 탁 트인 곳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그러나 속내를 자세히 살피면 뒤의 든든한 등받이를 틀어지지 않게 고수한 결과로, 먼 곳의 힘 있게 보이는 목형산 옆 경사를 보고 향을 하였다. 그리고 풍수에서 가장 피해야 할 파구처(명당의 물이 빠져나가는 지점)를 비켜 바라보고 있으니, 재물이 지속하여 빠져나가는 좋지 않은 방위이다. 아마도 당시 풍수사가 향을 정하는데 상당한 고심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 혈처

 

이제까지 기술한 어떤 조건보다도 중요한 부분이 생기의 축장처(蓄藏處) 즉, '혈'(穴: 산의 생기가 일정한 지형을 만나 더 이상 흐르지 못하고 뭉친 지점)이다. 왜냐면 혈은 곧 나 자신이고 나머지 주변의 산과 지형은 가족, 친구, 동업자, 손님 등 타인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완벽해 보였던 분수척이론(分水脊理論: 빗물이 떨어져 좌우로 갈리는 능선의 제일 높은 곳 바로 밑으로 생기맥이 흐른다는 이론)을 감히 거스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흔히 내청룡(內靑龍: 가장 가까이에서 혈을 감싸는 청룡)이나 내백호(內白虎: 혈에서 가장 가까운 백호)의 용척(龍脊: 용의 척추 즉, 산 능선 가장 높은 곳)에서 결혈처를 필사적으로 찾을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익히 증명된바, 용척이론(龍脊理論)을 따르면, 맥로(脈路: 생기가 흐르는 통로)는 반드시 분수척 밑에 있지 않고 주변 여러 조건에 따라 일정 범위를 벗어나서 진행하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은데, 분수척에서 양쪽 사면으로 10 ~ 30미터 이내를 용척으로 보고 이 범위 어느 곳에나 기맥이 흐를 수 있으니, 앞에서의 분수척이론으로는 정확한 기의 경로를 추적하기 어렵다. 또한, 생기는 바람과 물을 피하는 속성이 있어 평탄하고 주위 지형이 바람을 막아주는 조건이 되는 곳, 즉 내청룡과 내백호 사이의 안정되고 아늑한 곳에 결혈한다.

 

당시 풍수사가 혈을 오판한 또 다른 혈증(穴證: 혈을 증명하는 자료)은 현재의 봉분 좌측 숲 속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산자락이 묘 조금 아래 높이까지 뻗어 있는데, 만약 용척이론을 제외하고 판단한다면, 이 산줄기를 잘못 보아 혈을 보호하는 내청룡으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리라 추측한다. 


                     묘 좌측의 내청룡으로 보이는 산자락  


정리하면 시조묘의 봉분은 지척에 있는 대혈처의 큰 기운을 받지 못하고 내청룡 위에 있다. 그리고 자신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호하여 줄 내청룡의 원형을 훼손하고 있다. 앞에서 기술한 조산과 안산을 심히 불리하게 조성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잘못 자리 잡은 혈처와 마주할 적합하지 않은 조안산을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 묘의 봉분은 정작 지름 10미터쯤 되는 혈권을 벗어나 지척에서 어려움을 겪는 모양새이다. 아마도 포근한 둥지 속으로의 이동이 수백 년 동안의 염원(念願)이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혈의 위치에 대하여는 기술하지 않음이 풍수 학인으로서 해야 할 도리이다. 왜냐면 혈처의 주인이 있으니 타인의 도장(盜葬: 몰래 묘를 씀) 등을 방지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 고의로 점혈(點穴: 한의학 용어로 혈자리에 점을 찍음)을 틀리게 하는 예도 있으니, 혈을 벗어나서 쓴 왕릉(王陵)이 뜻밖에 절반을 넘는 확률로 눈에 띈다. 물론 국지사(國地師)의 실력이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옛 사료들을 보면 당파 싸움에 몰두한 나머지 반대파에게 묘 발음이 미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지사를 매수하여 정혈을 어긋나게 하는 예도 있다. 또한, 금혈지(禁穴地: 왕이 날 정도의 큰 자리는 묘를 쓰지 못하게 하여 역모의 기운을 미리 막음)의 경우 부득이 혈을 벗어나 쓰기도 하였다.

 

혈심(穴深: 혈의 중심)은 젓가락 꽂듯이 정확한 자리인데 1~2미터만 벗어나도 발음의 효과가 평균 40% 정도, 3~4미터이면 80% 정도가 감소한다. 시조묘는 혈권(穴圈: 생기가 혈처에서 맴도는 범위)에도 들지 못하였으나, 주변의 좋은 산과 용호의 응기를 받아 훌륭한 자손들이 많이 나왔다고 판단한다. 
                   


아. 진혈(眞穴)에 따른 좌향

 

현재의 시조묘가 내청룡상에 있으니 진혈은 봉분 기준으로 우측으로 이동한 지점이다. 이곳에서는 좌(坐)에 따른 등받이가 견고하고, 묘역을 다정하게 대하는 백호 줄기에 있는 문필봉(삼각형 산)을 향(向)으로 정할 수 있다. 이처럼 명당에는 애초부터 그에 걸맞게 정해진 조산과 안산이 있다. 따라서 잘못된 정혈은 잘못된 좌와 조안산을 부르게 됨을 피할 수 없다.  


막연하게 먼 곳을 바라보는 묘의 향은 그곳을 동경하며 기를 빼앗기는 불리함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진혈에 따라 좌향을 바꾼다면 일정 범위의 내명당을 굽어보며 생기가 축장될 수 있는 아늑한 공간을 품는 대명당이 된다.

 

한 예로 조선을 탄생시켰다는 대명당으로서의 삼척 준경 묘역은 청룡 백호 밖의 세계는 전혀 보이지 않는 조밀함으로 쌓여 있어 생기가 쌓이고 허실이 없는 국세이다.

 

시조묘 아래의 묘역은 같은 내청룡 줄기 상에 있으면서도 향은 바르게 정하였다. 그러다 보니 묘의 좌(등받이)가 비스듬히 틀어져 안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시조묘의 기존 조건을 거스르지 않는 조건에서의 산역이라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조묘 아래 묘역의 조안산  


                      틀어진 등받이 


5. 재물에 불리한 국세

 

만대산 묘역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시조묘에 이르는 산세의 급경사이니 재물을 상징하는 빗물이 머무를새 없이 빠르게 흘러내려 가는 가난한 국세이고, 단지 자손 중에 글 잘하는 걸출한 학자를 여럿 배출할 산세이다. 이를 보완하려는 마음으로 장로 옆의 개울을 유심히 관찰하며 하산을 한 결과, 물길을 막아 명당수(明堂水: 묘역 주변의 명당을 흐르는 물)를 저장하여 재물창고 역할을 할 장소를 찾았다.

                      연못 만들기 적합한 곳


다른 문중의 예를 들면,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최영 장군의 묘가 있다. 산의 경사가 만대산보다 훨씬 완만하지만, 명당수를 모으고자 자손들이 노력하여 묘역 앞에 연못을 조성하고 그에 따른 부(富)의 발음을 도모한 예가 있으니, 선례로 참고하여 반드시 묘역 주변에 연못을 조성하여 비보(裨補: 묘역의 흠결을 보완하고 모자라는 것을 채움)하여야 할 사항이다.

 

6. 역사 속의 사례

 

생전 풍수지리의 이치를 잘못 이해한 대표적인 왕이 세종대왕이다. 1446년(세종 28년) 소현왕후가 죽자 현재의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릉(獻陵 : 태종릉)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성하였다. 신하들이 능 자리가 좋지 않아 다른 장소를 권하였으나, 세종은 부왕의 능에서 가까운 곳보다 좋은 장소가 어디에 있겠느냐며 왕비를 애초 계획대로 안장하였다. 그리고 4년 후 1450년 세종이 죽자 합장하여 수릉(壽陵)이라 하였다.

 

그 후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文宗)이 즉위하였으나 재위 2년 3개월 만에 병사하였고, 뒤를 이어 문종의 아들인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 역시 3년 만에 왕위를 강요에 의하여 수양대군에게 물려주게 된다. 세종의 제2 왕자인 수양대군(1455~1468)도 재위기간 동안 여러 괄목할 치적을 남긴 채 13년 만에 승하하고, 세조의 차남인 예종(睿宗)이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재위 13개월 만에 사망한다. 또한, 예종의 왕비 장순왕후(章順王后)마저 첫 원자(元子: 세자로 책봉하기 전 임금의 장남)를 낳고 사망했으며, 곧이어 원자마저 사망하였다.

 

세종 이후 18년 동안 3명의 왕이, 길게는 소현왕후 이후 예종의 원자까지 23년 동안 왕과 왕비 및 왕손을 합한 7명이 사망하였다. 신하들이 수릉(壽陵)이 흉지인 연유로 왕실의 흉사가 끊이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여 이장하기 위해 개장(改葬: 이장과 같은 말로 다시 장사 지냄)을 한바, 광중이 냉하여 18년 된 시신이 썩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풍수지리는 불가시의 영역을 상당 부분 포함하므로 논리적이거나 객관적인 이치를 도출하지는 못한다. 보이지 않는 기(氣)를 대상으로 길흉화복을 예단하기 때문에 현재의 수준으로는 비과학적이라는 평을 들을 수 밖에 없다. 아니 현재의 학문 수준으로는 풍수지리를 과학화하지 못한다는 말이 더 타당하다. 그러나 그 예단은 무서울 정도로 맞아떨어지니 어찌 이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근래에 보한재 신숙주(1417~1475) 할아버지의 주변에 관한 송사가 진행 중이다. 그분은 앞서 예시한 모든 왕의 재위기간을 거치며 왕을 도와 위대한 업적을 쌓으신 분이다, 아마도 시조묘가 바로 가까이에 있는, 제왕지지(帝王之地: 황제나 왕이 날 자리)와도 견줄만한, 대혈처를 점하였다면, 역사의 맥락에서 감히 그분을 폄훼(貶毁)하는 따위의 경거망동한 언행을 하지 못하였으리라 본다.

 

많은 시간을 풍수 연구에 할애해왔지만, 풍수 문화가 음택(陰宅: 사람 사는 집과 대비하여 무덤을 이르는 말)에 치중하는 잘못을 부정할 수는 없다. 훗날 화장문화를 좀 더 보편화하여 인간의 길흉화복이 조상 묘 발음을 적게 받는, 다른 요인들로 결정되는 시절이 분명 도래할 것이다. 다만, 그때까지는 권도(權道: 예외적이고 특수한 상황에서 임시적인 정당성을 가지는 행위규범)로써 그 이치에 맞게 판단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7. 물형론(物形論)

 

어느 타성바지의 글 중에 “만대산에 있는 고령 신씨 시조묘가 우리나라 8대 명당이라고 하나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등잔은 먼 곳만 비추고 정작 그 밑은 비추지 못하여 어둡다는 이치와 같이, 그 곳 마을에는 고령신씨 후손이 아무도 살지 않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앞에서의 비유를 물형론(산과 주위의 형세를 사람, 동물, 곤충, 물고기, 꽃, 사물, 문자 등 만물의 형상으로 보는 방법론)으로 해석한다면, 시조묘는 분명 높은 곳에서 먼 곳을 비추는 모양새이니 괘등조세형(掛燈照世形: 높이 매단 등불이 멀리 세상을 비추는 형국)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명칭은 정작 자기 자신은 별로 내실이 없으면서 세상에 이로움만을 주는 의미이다.


명당의 형세에 대하여 이름을 짓는 방법 중, 주변 산줄기의 형태를 흔히 고려한다. 만약 가지가 없는 산줄기는 학이나 닭의 깃털이나 다리에 해당하는 명칭을 부여한다. 묘역 을 에워 싼 산줄기는 가지를 많이 친 모습으로서 봉황의 깃에 비유할만 하고 만대산은 봉황의 머리에 해당한다. 따라서 봉황이 자신의 왼쪽 날개로 감싼 둥지에 포란(抱卵)하려는 형상이다.

 

그러므로 만대산의 주혈(主穴)은 소라껍데기처럼 돌아들어 가 감춰진 곳에 봉황이 둥지를 튼 대명당 혈처이다. 즉 시조묘의 적합한 명칭은 ‘운중봉과형(雲中鳳窠形: 구름 속의 봉황 둥지 형상)’이다. 하지만, 봉황이 품을 알(卵)이 없는 빈 둥지를 뒤로 한 채 착잡한 마음으로 하산 할 수 밖에 없다.

                      청룡 쪽 외명당의 수려한 문필봉들


8. 맺는말

 

육체를 벗은 신(神)의 수명이 길게는 1000년 정도이니 아직 200 여년의 발음기간이 남아 있으며, 1 ~ 2년의 짧은 기간내에 묘 발음으로 자손의 길흉화복이 뒤바뀌는 현상이 비일비재하기도 하니, 앞으로 산역을 결정하는데 참고할 자료로 기록한다.

 

비문의 기록으로 보아 1606년 고을 사람들이 시조묘를 훼손하고 석물을 매장하는 사건이 벌어진 후, 이를 후손들이 복원하는 곡절 끝에 원래의 위치를 이탈하였을 개연성도 있다. 만약 그 추측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영향으로 1606년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여 사건 이전에 출생한 후손 중 걸출한 인물이 더 많이 나왔던 현상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맺고자 하는 말은, 우선 갖추어진 범위에서나마 온 힘을 다하여 문중의 번영을 도모하여야 하는바, 그 일환으로 묘역에 대한 통행 계단과 승금 형태의 개선은 어려운 산역이 아니고, 비보로써 명당수 저장을 위한 연못 조성은 반드시 필요하며, 가장 중요한 이장 및 좌향의 개선은 중지(中智)를 모아 결정할 문제이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