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이야기(칼럼)

대견사, 풍수무전미(風水無全美)

풍수명인 2015. 8. 24. 11:10

  지난 7월 11일 신지식협회 등산동우회에서 단체로 달성군 소재 명산 비슬산을 산행하는데 동참하였다. 그곳에서 본 대견사에 대한 소고(小考)를 하고자 한다. 

 

상서로운 대견사터

   흐르는 땀을 닦으며 대견사에 올랐다. 산행의 노고를 보상이라도 하듯, 하늘을 배경 삼은 대견사는 신령한 자태로 한 편의 천상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도대체 해발 1,000m에 가까운 산의 정상부에 어떤 연유로 사찰이 세워졌는지 호기심 속에 접근하였다. 이어서 그 중심인 ‘대견보궁’을 맴도는 상서로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해발 1,059m의 대견봉을 출발한 생기가 횡으로 진행하며 정상부에 혈을 맺었다. 거기에 신라 헌덕왕 때(809~825년 재위) 대견사를 창건하였다는 내용이 <동국여지승람>에 전한다.

 

대견사

 

   우리 고대 민속사 연구에 가장 귀중한 사료는 단연코 삼국유사이다. 일연스님(1206~1289)은 22세부터 44세까지의 23년간, 59세부터 72세까지 14년간 합 37년 동안 비슬산(옛 지명 포산)에 머무르며 사료를 수집한 후, 삼국유사를 완성하였다(일연, 비슬산 37년).

   삼국사기는 여러 명의 사관(史官)에 의해 만들어진 정사(正史)인 반면, 삼국유사는 일연스님 혼자 집필한 야사(野史)의 성격으로 삼국사기가 담지 못한 많은 신이(神異)한 사화(史話)를 기록하고 있다. 즉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서는 볼 수 없는 신화와 설화의 보고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삼국유사는 비슬산의 신령한 기운을 받으며 속세의 권력이나 이해로부터 자유롭게 쓰인 역사서이다. 오늘날의 왜곡된 역사책과는 구별되는 대목이다.


  일반적으로 산의 정상부에서 시작한 생기는 밑으로 진행하면서 주변의 기를 흡수하며 물이나 산자락에 이르러 혈을 맺는다. 따라서 주변 속세의 다양한 잡기(雜氣)들이 생기와 혼합하여 생기맥을 흐른다.

이와는 반대로, 산 정상부의 대견사를 감싸 안은 생기는 잡기가 섞이지 않아 순수하고 상서로운 기이다. 그곳에서 일말의 신령스러움을 느낀 이유이다.

 

   대견사, 대견봉, 천왕봉을 아우르는 비슬산은 대부분 암괴류로 이루어졌다. 보통 흙에서는 주위를 포용하는 부드러운 음기를 발산하나, 주위가 대부분 바위와 암반인 대견사는 바위 특유의 화기(火氣)가 하늘의 천기와 섞이며 매우 강한 양기를 생성하고 있다. 이 화기는 비슬산의 북쪽에 있는 대도시 대구가 뜨거운 기운에 허덕이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비슬산 암괴류

 

   산의 정성부인 절터에서 물이 솟는 샘이 있으니 다시 한 번 기이한 느낌을 감출 수 없다. 바로 혈 앞을 흐르는 ‘진응수(眞應水)’라고 말하고 싶다. 진응수는 대귀지(大貴地)에서 나오며 영천(靈川)이라고도 한다. 그 물은 맑고 달고 아름답고 고요하게 흐른다. 또한, 사시사철 넘치거나 마르지 않는다. 따라서 대견보궁을 맴돌다 맺힌 혈이 진혈(眞穴)임을 증명하고 있다.


   비슬산의 ‘비슬(琵瑟)’에는 임금 王자가 넷이다. 네 명의 왕이 나는 곳이라 하여 그곳 사람들은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지역을 넓혀보면 네 사람의 대통령(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이 나와 셋은 이미 임기를 마친 것으로 풀이하나, 지역을 달성군 내로 좁혀 보면 아직 한 사람의 대통령(박근혜)만이 나왔다 하여 세 사람이 더 권좌에 오를 것이라는 “사왕설”도 설득력 있어 보인다. 또한, 비슬의 한자에는 견줄 비(比)와 반드시 필(必)자가 들어있어 ‘틀림없이 그렇게 된다.’라는 뜻이라 전한다. 이외에 비슬산 ‘사왕설’의 또 다른 해석으로 앞으로 4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할 것이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비슬’이라는 지명의 한자에 담긴 뜻이 일말의 부러움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특정한 바람을 자주 생각하거나 염원하면 실제로 이루어짐을 자주 보아왔기 때문이다.


괘등조천형(掛燈照天形) 명당

   산행 후 협회 회장 및 등산회 회원들과 달성군수 이하 군청 직원들이 참석하여, ‘신지식인협회와 달성군의 상생발전을 위한 업무 협약식’이 있었다.

   행사 도중 달성군 측의 권유로 필자는 대견사에 대한 풍수 소감을 피력하였다. 하늘 높은 곳에서 창공을 향해 상서로운 기를 발산하는 대견보궁의 혈 기운을 “괘등조천형(掛燈照天形; 등잔 대의 등불이 하늘을 비추는 형국)”이라고 명명함을 발표하였다. 풍수적인 형국 명으로는 최고의 표현이며, 그밖에 달리 표현할 명칭도 없음을 말하였다. (달성군수께서는 본인에게 감사의 편지와 함께 달성군과 비슬산에 관한 여러 서적을 동봉하여 보내주신바, 간단하나마 본 칼럼을 쓰는 훌륭한 참고자료로 삼았다.)

 

대견사의 수난사

   달성문화재단이 펴낸 학술 집에는 여러 사학자의 자료를 기록했는데, 이를 참고로 대견사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기술해보기로 한다.

  

   포산(비슬산)의 보당암(대견사의 옛 이름으로 추정)은 신라 하대인 헌덕왕 때 왕실의 사찰로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일연의 삼국유사의 산실 역할을 하던 중, 몽골의 침입으로 평지에서도 잘 올려다보이는 보당암을 피하고자 일연이 거처를 옮긴 후, 점차 쇠락하다가 고려 말(1371년 무렵)에 다시 중수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산 정상에 입지한 보당암의 지리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여말선초의 혼란기에 지원과 비호받기가 어려워 다시 폐사화하였다.

   사회가 안정된 조선 초(1402년) 작성한 이첨의 <소문>에는 보당암을 중창하고 일신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보당암은 이후 대견사로 사명을 바꾸어 사서에 수록된다.

   <현풍현읍지>의 기록으로 보아 임진왜란 때 “대마도를 진압한다”는 명분을 가진 대견사가 왜병들에 의해 폐사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처럼 임진왜란 때 폐사된 대견사는 난이 끝난 후 2차에 걸쳐 또다시 중창되었다.

   그러나 불교가 국가였던 통일신라 및 고려 시대와는 달리 억불정책하의 조선 시대를 버티기 어려워 대견사는 18세기 후반에 또다시 폐사되었다고 <현풍현읍지>는 기록하고 있다.

   이어서 대한제국기인 1900년 영친왕의 즉위 축원의 불사를 통해 중창되었다. 하지만 일제가 영친왕을 인질로 잡아간 후 1909년 재차 폐사의 불운을 맞았다. 대견사가 “영친왕을 축원하고 왜를 진압한다.”는 항일의 염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본다.

   폐사 후 100여 년이 지나 현 달성군수를 주축으로 한 다수의 열정과 각고의 노력 끝에 대견사의 복원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보상이라도 하듯, 대견사 중창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길사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달성 김군수의 경우 2014년 총선에서 무투표로 재선되는 행운이 있었고, 대견사 불사를 맡았던 성문스님은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대견보궁 현액을 쓴 정종섭 교수는 장관으로 임명되고, 중창사업 담당 공무원은 6급에서 5급으로 승진하는 영예를 누린 바 있다.

 

대견보궁 

 

풍수무전미(風水無全美)

  풍수무전미 즉, “풍수에서는 지상낙원처럼 완벽하게 아름다운 땅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향후 대견사의 풍수지리에 대한 비보진압 방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곳 달성 사람들의 대견사를 향한 열정에 조금이나마 부응하는 방도가 되기를 희망한다.

  

  풍수지리는 나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 속성이 있다. 혈처를 찾기 어려운 이유도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도록 은닉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치 귀부인이 앞에 발을 드리우고 앉아있어, 안에서는 밖이 잘 보이지만 밖에서는 안을 잘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한, 추하거나 흉한 것, 약한 것은 철저히 외면하는 반면,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수려하고 강한 주변 산세와 대면하고 교감하는 이기적인 속성이 있다. 그리고 자기와는 반대되는 성을 찾아 어울리는 음양의 조화를 꾀한다. 당연히 명당인 주인공은 주변을 적대시하지 않고 선린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대견사의 비보진압

  첫째, 기록대로라면 산 아래 현풍 들에서도 환하게 올려다보이는 대견사는 앞서 기술한 대로, 몽골의 침입과 임진왜란 시 적들의 표적이 되어 폐사되는 불운을 겪었다. 물론 대마도(왜)를 진압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오히려 해를 입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현재의 대견사터 앞에 적절한 조림(造林)을 하여 바람을 갈무리하고 허함을 비보 함이 좋으리라는 생각이다.

 

현풍면 전경

 

  둘째, 사찰 터에서 솟아나는 샘을 진응수라고 하였으나, 비슬산과 대견사터에서 발산하는 양기와 화기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따라서 음기를 보충하기 위해 절터의 적절한 곳을 선정하여 연못을 조성하고 마르지 않게 관리해야 한다. 그리하여 양기와 음기의 조화를 꾀할 수만 있으면, 각고의 노력으로 복원한 대견사가 길이 보전되리라 본다.

 

   셋째, 협회지 직전 호의 풍수 칼럼에서 언급한 경기도 여주 소재 ‘고달사’를 폐사에 이르게 한 주된 원인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대견보궁을 감싸는 생기는 혈이 되어 멈추었으나, 혈을 침투한 또 다른 기운을 느끼고 난 후, 그 황망함을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다. 고달사는 오래전 폐사되어 복원하지 못하였지만, 대견사는 대여섯 번의 중창과 폐사를 겪어온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상응한 조치를 하여 대견사가 과거의 불운을 다시는 겪지 않고 영구 보존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끝으로 대견사를 사랑하는 그곳의 모든 사람의 건승을 기원함과 동시에 그들의 열정에 찬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