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집 제9권 희년록(稀年錄) 용졸재기(用拙齋記)의 내용으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같지 않은 이유는 그들 속에 내재(內在)한 기(氣)와 이(理)가 서로 꼭 합치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기(氣)라는 것은 원래 사람이 태어날 때 넉넉하게 받을 수도 있고 부족하게 받을 수도 있는 반면에, 이(理)라는 것은 처음에는 중(中)의 상태가 못 되었던 것이라도 중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가령 교(巧)와 졸(拙)을 쓰는 것으로 말하면, 선천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사람의 후천적인 행위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졸(巧拙)이라고 흔히 병칭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강유(剛柔)나 강약(强弱)과 같은 상대적인 개념을 지닌 명칭은 아니다. 교(巧)라는 것은 보기 좋게 합리화하여 꾸미면서 장난을 치려고 하는 데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필경에는 사람의 거짓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졸(拙)이라는 것은 뭔가 모자란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늘의 작용[天機]에서 전혀 이탈되지 않는 순진(純眞)한 행동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교(巧)‘는 동적으로 변화를 잘하며 꾸미는 성질이고 ’졸(拙)‘은 존재 자체의 정적인 정체성을 변화 없고 꾸밈없이 표현한다. 이런 이유로 옛사람들은 자신을 교(巧)하다라기 보다는 졸(拙)하다라는 평을 아주 좋아하였음을 고서의 기록을 보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선인들이 졸(拙)과 교(巧)를 유추해서 선과 악에 비유하여 판별하려 하였으나, 예나 지금이나 세상을 합당하게 사는 데는 졸(拙)과 함께 교(巧)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으리라 본다. 다만, 지나친 교(巧)를 경계할 뿐이다.
산(山: 拙)과 물(水: 巧)
지리를 논할 때 바람은 산이 막아주고 들판과 같은 평지는 물로 보니, ‘산’과 ‘물’이 풍수의 주된 연구 대상이다. 산은 변함없이 졸(拙)하기 때문에 그 형상과 면배(앞뒤)를 잘 살펴야 하고, 물은 변화와 꾸밈이 많아 교(巧)하기 때문에 그 흐름의 양상과 장소를 면밀히 파악하여야 함이 자리를 구하는 이치이다.
왼쪽 경사면-산의 뒷면(등), 오른쪽 경사면-산의 앞면
그러므로 지리를 볼 때는 산의 앞면을 보고 포근하게 품은 자리를 찾음이 으뜸이니
하지만 졸(拙) 중에는 작은 교(巧)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물이 교(巧)하게 흐르는 가운데 작은 졸(拙)이 있어 그 흐름을 변화시키기도 하니, 어느 것이 우월하고 바람직하다는 기준을 세우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산은 그저 졸(拙)하게 고고한 모습으로 서 있을 뿐, 이를 일깨우고 재능을 발휘하게 하는 교(巧)로서 물의 역할이 있다. 그러므로 둘은 서로 견제하지 않고 보완하는 동반자 관계이다.
임실 삼계면 박사마을의 산과 물
귀(貴: 拙)와 재(財: 巧)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옛사람들은 벼슬과 문장 잘함 또는 명석함 등 졸(拙)함을 귀하게 생각하고 재물 즉, 교(巧)함을 상대적으로 천하게 여겼다. 현대에서는 이와 반대로 교(巧)함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터를 구하러 찾아오는 사람의 첫 일성이 "부자 될 자리를 찾아 달라."이다.
이렇듯 졸(拙)로서의 산은 사람에 대한 개성과 적성, 현명함과 우둔함 그리고 지위(신분)의 귀하고 천함을, 그리고 사람 간의 위계질서와 호감 또는 비호감 등 정적인 상태를 주로 표현한다. 즉, 사람이 평생 지니는 정체성(正體性)을 짐작게 한다.
한편, 교(巧)인 물은 산(拙)의 생김새대로 휘돌아 흐르기도 하고 고여 있기도 하니 풍수에서는 동적이고 변화하는 성질로 파악하여 재물로 본다. 돈이나 재산이 없어지기도 하며 생기기도 하는 이치이다. 그러하니 교(巧)로서의 물은 졸(拙)인 산보다 사람의 길흉화복에 빠르게 작용한다.
궁극적으로는 졸(拙)로서의 귀(貴)와 교(巧)로서의 재(財)는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싶어 하는 가치관이 되니, 현대에서는 귀가 재를 부르고 재로 말미암아 귀가 들어 오는 이치가 상통하여 서로 동업자로서의 역할을 주고받는 것이다. 이치가 이와 같으니 지리를 볼 때는 둘 중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교와 졸을 형평 있게 보되, 화장한 여인을 감상하는 경우와 같이 교(巧)인 물길을 먼저 보고 그 여인의 내면인 졸(拙: 산)을 파악하는 순서를 밟아야 함이 바람직하다.
겸손(拙)과 교만(巧)
졸(拙)로서의 산은 교(巧)에 비하면 겸손하다고 할 수 있는데 더욱더 겸손하기를 원한다면 자신을 허물어뜨려 평지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평지는 더 이상의 졸(拙)이 아니고 교(巧)의 겸손한 모습이다. 이처럼 지나친 겸손은 참다운 겸손이 아니니, 산으로서의 자세를 변함없이 유지해야 한다.
교(巧)로서의 물은 그 교만함을 속히 벗으려 빠르게 흘러 내려와 평지를 만나며 흐름이 느려지고 고요해지면서 비로소 겸손해진다. 즉, 초기에 요란하게 흐르면서 주위의 기운을 빼앗아 교만하게 흐르다가 평평한 곳에 이르러 고요히 흐르며 겸손하게 그 기운을 전해 주는 속성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이치로 지리를 볼 때 물이 떠나기 싫어하거나 머물러 있기를 좋아하는 자리를 길한 곳으로 본다. 더 나아가 남녀가 격렬히 교합하며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 졸(拙)한 산이 교(巧)한 물길을 거슬러 막아서며 보내지 않으려는 듯한 자리가 대길한 것이다.
사실(巧)과 진실(拙)
사실은 꾸밈이 많으며 변화가 잦고 거짓됨을 포함하며, 진실은 하늘의 작용[天機]에서 전혀 이탈되지 않는 순진(純眞)한 행동이요 변화가 없다 하였다. 그러므로 사실은 교(巧)이고 진실은 졸(拙)에 해당한다.
낮에는 태양이 그리고 밤에는 달이
하늘에서 번갈아 뜨고 진다.
이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사실’이다.
하지만 진실은 아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진실’은 어떠한가?
지구가 자전하고 있는 것이다.
풍수를 포함한 세상사는 모두
사실(巧)과 진실(拙)의 갈등과 조화이다.
우리를 포함한 모든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실(巧)의 영역과
보이지 않는 진실(拙)의 영역이 병존한다.
산이 거기에 있고 물이 흐르는 모습을
우리는 사실로써 볼 뿐이다.
대자연은 낮출 대로 낮춘 산(拙)의 모습과
낮은 곳으로 흐른 후 높아지는 물(巧)의 이치로
보이지 않는진실도 깨닫게 하는 것이다.
하늘에서나 지상에서나
보이는 세상에서나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나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교만함에 머물거나
그 자체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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