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의 광양시 옥룡면에는 사적 제407호인 옥룡사지(玉龍寺址)가 있다. 신라 말기인 864년 선각국사 도선이 이곳에 옥룡사를 창건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 폐사되어 사가(私家)의 선산에 편입되었다가 일제강점기 이후 동백사(冬栢寺)와 백계사(白鷄寺)로 불렸다. 그 후 다시 법왕사(法王寺)를 거쳐 도선의 호인 “옥룡자”를 따서 옥룡사로 명칭을 바꾸게 된다.
도선은 그의 책 도선비기(道詵秘記)에서 지리쇠왕설(地理衰旺說)·산천순역설(山川順逆說) 및
(裨補說)을 주장하였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태도 왕건은 “도선선사가 지정하지 않는 곳에 함부로 절을 짓지 말라.”하는 내용을 훈요십조(訓要十條)에 남길 정도로 도선의 풍수사상을 신뢰하였다.
절터 입구 한참 전부터 동백나무 숲이 울창하게 이어진다. 광양시에서 세운 안내문에는 동백의 기운에 의한 지기 보충이라는 막연한 기록을 하였지만, 산 8부 능선쯤에 있는 터의 허술한 청룡 백호를 보다 조밀하게 보완하여 산 밑에서 올라오는 골바람을 막고 물흐름도 좀 더 역수(逆水)하게 하고 느리게 하려는 비보풍수 전문가인 도선의 의도를 간과하지 않음이 더 중요하리라는 생각이다.
풍수에서의 백미는 무어라 해도 정혈(定穴; 혈처를 정확히 찾아 정함)이다. 보통 사람이나 풍수를 어지간히 공부한 사람의 수준으로는 정혈하기가 불가함이 보통이니, 수천 년의 시간이 흘러도 땅속의 혈을 찾고 취하는 것을 커다란 행운으로 치부함은 불변의 진리이다. 이를 달리 설명하자면, 범안(凡眼)을 가진 사람은 혈을 옆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풍수에서는 높은 곳, 급경사, 좁은 장소, 날카로운 지형을 흐르는 생기는 드러나지 않고 땅속 깊게 흘러 눈에 잘 띄지 않으니 여성에 비유하여 음산(陰山)으로 본다. 반대로, 낮은 곳, 완경사, 넓은 장소, 곱고 부드러운 곳에서는 생기가 지표 가깝게 흘러 그 움직임이 잘 보이므로 이를 남성으로
보아 양지(陽地)로 분류한다. 즉, 음(陰)과 양(陽)의 구분이 세상의 상식과는 배치된다.
또한, 하늘은 모나지 않고 평평하고 부드러우니 양이요, 땅과 산은 거칠고 날카로운 곳이 있고 높고 낮은 변화가 심한 지형이 있으니 음이다. 따라서, 세상의 상식을 지닌 사람으로서는, 음의 지세에서 양의 형태로 때로는 그 반대로 변화하는 지형에 생기가 흐르고 혈이 맺히는 변화무쌍한 풍수의 이치가 난해함이 당연하리라 본다.
혈(穴)은 형태에 따라 새 둥지(窩) 모양 또는 두 다리(鉗) 형상으로 양(陽)의 지형에서 변화하여 솟은 음(陰)의 지점에 맺히는 혈형이 있으며, 이와 달리 늘어진 젖(乳)이나 솥단지를 엎어 놓은 형상(突)의 음의 지형에서 양으로 변하여 결혈하는 형태가 있다. 이와 같이 풍수에 있어서의 혈을 네 가지 형태로 분류한다. 이 중 상대적으로 높은 지형인 유(乳)형과 돌(突)형 혈은 바람을 막아주는 주위 산이 없을 때는 결혈하지 못한다.
이곳 옥룡사지는 산의 8부 능선에 있어 바람에 생기가 흩어질 수 있는 취약함을 안고 있으니 방풍이 잘 되는 새 둥지나 양 다리(또는 부젓가락)형의 와(窩)혈 또는 겸(鉗)혈이 있을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이런 이유로 도선도 터를 잡을 당시 바람에 허한 점을 보완하고자 청룡과 백호 자락에 동백나무를 조밀하게 식재하였을 것이다.
이곳 절터를 여러 권역으로 나누어 5차례의 발굴조사를 거쳤는데 발굴지 중 유독 한 곳에서 평범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바로 도선국사의 유골이 발굴된 부도탑(浮屠塔)이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지점으로 현재는 잔디로 덮여 있다. 이곳을 발굴조사한 후 복원할 때 석물들의 위치가 변경되었으리라 생각한다.
혈을 맺게 하는 땅속 생기(生氣)는 따뜻한 성질이 있어 대체로 생물의 성장을 왕성하게 하지만, 바람을 잘 막는 지형에서는 지나치게 더운 기운이 되어 초목이 잘 자라지 못한다. 이 터는 높은 곳이지만 주위 산들이 잘 감싸 장풍이 잘되는 결과 겨울철에도 그 일대에 온기가 감돌고 여기에 혈의 기운이 더하여지며 지온이 올라가 혈처 잔디가 불에 데인 것처럼 잘 자라지 못함을 육안으로도 볼 수 있는 상태이다. 한겨울의 눈 내린 들판이나 야산에서는, 유독 한 지점의 눈이 녹아 맨땅을 드러내며 혈처가 보이기도 한다.
대웅전 터로 보이는 곳에서는 주위 땅보다 미미하게 솟아 있는 또 다른 혈처가 보인다. 평평하게 양(陽)으로 온 지기가 음(陰)으로 변화하는 자리에 땅의 생기가 회전하면서 혈을 맺었는데, 회전 지름이 4~5미터의 중형크기로 새 둥지(窩)형 혈이 터 고르기와 퇴적작용을 거친 후 변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풍수의 이치를 토대로 땅을 보면 이제까지 느끼지 못하고 보지 못하던 여러 사실을 알게 된다. 도선국사의 부도 자리에서는 산자락이 감싼 정중앙의 균형 잡히고 치우침이 없는 안정된 곳에 혈을 맺고 있다. 또한, 대웅전 터는 생기가 스스로 흐르다 바람과 연못(물)을 피하여 편안함이 느껴지는 평탄한 장소에 머물러 혈을 맺었다. 이를 다른 각도에서 표현하자면, 산은 살아 있는 엄연한 생명체라는 사실이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편리함을 추구하여 산과 자원을 훼손하고 파괴하였으나, 산은 왕성한 활동을 하는 한 생명체 임을 인식함과 아울러 사람이 자연과 공존하려는 배려함이 아쉬울 뿐이다. 더 나아가 땅이 주는 혜택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그 허술함을 보완할뿐만 아니라 자연을 치유하는 신개념의 비보풍수(裨補風水)가 더욱 절실함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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